사회가 준 역할은 왜 우리를 가두는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답한다. “저는 회사원이고, 두 아이의 엄마이며, 장남입니다.” 하지만 이는 정체성일까, 역할일까?
많은 사람이 자신을 사회적 역할로 정의한다. 이름보다 직책이 먼저 떠오르고, 꿈보다 책임이 먼저 따라온다. 우리는 회사에서는 성과를 내는 직원이어야 하고, 가정에서는 좋은 부모, 사회에서는 예의 바른 시민이어야 한다. ‘사회적 역할’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기대하는 모습이다. 문제는 그 역할이 어느 순간 ‘나’라는 존재 전체를 삼켜버릴 수 있다는 데 있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런 상태를 “소외된 자아”라고 불렀다. 개인은 자신의 진짜 욕망이나 감정을 억누른 채, 타인이 기대하는 모습을 연기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잊는다. 자아는 조용히 뒷걸음치고, 남들이 원하는 ‘역할의 껍데기’만이 남는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직책이나 사회적 타이틀을 갖고 오지 않는다. 우리가 주어진 이름과 규범 안에서 살아간다 해도, 그 틀 바깥에 존재하는 ‘진짜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문제는 그 진짜 나를 어떻게 발견하고 복원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기를 보는 ‘거울 자아’의 함정
심리학자 찰스 쿨리는 ‘거울 자아(looking-glass self)’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볼지를 상상하고, 그 상상 속에서 자아를 구성한다”고 설명했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사는 내가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까 봐 쉬는 시간에도 이메일을 확인하고, 부모는 내가 무책임하다고 할까 봐 원하는 전공 대신 안정적인 길을 택한다. 그 모든 선택은 ‘나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은 ‘타인의 기대’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의 자아 형성은 불안과 불만족을 낳는다. 왜냐하면 타인의 기대는 늘 변하고, 기대에 부응해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평가받는 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외부에서 찾게 된다. 자존감은 흔들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된다.
자기 인식이란 결국 ‘타인의 눈을 벗어난 자기의 눈’을 가지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는 ‘보이는 나’가 아닌, ‘경험하는 나’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이 나를 생기 있게 만드는지 탐색하는 것이다.

‘진짜 나’는 어떻게 발굴되는가? – 자아 탐색의 구체적 방법
“진짜 나는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간단한 도구들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그 시작은 바로 자기 성찰이다. 단순히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고 막연히 묻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가?
내가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최근에 가장 즐겁거나 기뻤던 일은 무엇이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글로 써보는 자기 탐색 일기는 자아를 구성하는 감정, 생각, 가치를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다양한 심리검사(예: MBTI, 에니어그램, Big 5 성격 요인 검사) 역시 나에 대한 언어적 틀을 제공해준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지만, 자아의 방향을 잡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진짜 나’를 찾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은 **경계 세우기(boundary setting)**다.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삶에는 타인의 의지가 침투할 여지가 많다. 내 감정과 시간을 지키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곧, 자아를 지키는 첫걸음이다.
껍데기를 깨고 삶을 다시 설계하는 용기
껍데기란 깨지기 전까지는 편안하고 안전하다. 그러나 그 안은 늘 눅눅하고 숨 막히다. 삶의 어느 순간, 사람은 반드시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 시기를 맞는다. 문제는 용기다.
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겪는다. 가족은 “너답지 않다”고 말하고, 친구는 “왜 굳이 힘들게 살아?”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진짜로 대면할 수 있다.
진짜 나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되려는 중’인 존재다. 진짜 나로 살기 위해선 수많은 거절과 실험, 불안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그 여정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만족하는 삶으로 다가간다.
가면을 벗는 순간,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 그리고 그 숨은, 우리의 존재를 다시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오늘, 나를 위한 시간을 10분이라도 확보해보자. 타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소리를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