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장마가 한창인 지금, 한강의 《노랑무늬영원》을 읽고 있습니다. 순간을 영원처럼 살고 있는 작가의 노력을 확인할 때마다 경이로움을 금치 못합니다.
맑은 시냇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는 글들 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것은 장모님의 형상이었습니다.
당신은 배가 부르다면서 눈물을 흘리셨지요. 아니 흘릴 눈물조차 없는 울음이었어요. 당뇨병에 시달리시다가 어느 날 늦은 밤에 흐느끼시던 그 울음소리가 잊히지 않습니다. 다음 날이 되어야 병원에 갈 수 있다고 말하며, 모두들 그 상황을 무시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당신은 마침내 병원에서 콧구멍 안의 살을 레이저로 지지는 시술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코피를 조금씩 삼켰을 것입니다.
이제 숨을 쉴 수 있다며 방긋 웃으셨지요. 그 미소가 기억납니다.
하지만 그 평화롭던 시간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코피가 나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입원을 했습니다. 나도 그 곁 간이침대에 누워 잠을 잤습니다.
집에 가서 자라, 괜찮습니다. 우리는 같은 말로 서로를 응대했지요. 우리는 늘 미소 지으며 말을 섞었지요.
조용한 병실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던 연속극 이야기들이 기억납니다. 하나의 연속극이 끝나면 채널을 돌려 곧바로 다른 연속극을 보기 시작했지요.
언제부턴가 주무시기만 했지요. 식사가 나왔는데도 졸립다고 하셔서 억지로 죽을 입에 물렸지요. 그날 저녁이었던가, 간호사가 잠이 든 당신을 살피더니 의사를 불렀지요. 그는 가족들에게 연락하라 했지요.
그때까지도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당신의 죽음을 분간할 수 없었어요.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어요.
아내가 십대 때부터 사귀었으니, 당신을 처음 뵀던 때는 아마 마흔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마당에서 김장 준비를 하실 때, 아내가 될 그 여자 친구와 나는 철없이 밖으로 놀러 나갔지요.
그 여자 친구는 늘 해맑았고, 항상 이상한 이야기를 펼쳤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어제 하지맞이 기념여행이라며 속초로 향했습니다. 한산한 국도는 나의 숨구멍이 되어 주었습니다. 파도는 잔잔했습니다.
늘 걷던 길을 걸었고, 항상 되돌아서던 지점에서 돌아서 오는데, 모래 속에 희고 굵은 밧줄 하나가 둥근 스템플러 심처럼 박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심코, “이게 뭘까?” 하고 묻자, 아내는 “이거? 지구 손잡이야! 이거 잡고 빙빙 돌리다가 저 멀리 던지는 손잡이라고!”
나는 한여름을 지나는 이 순간, 습기 가득 찬 수평선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지구를 상상했습니다. 나도 함께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귀갓길에 서쪽 하늘은 노을로 합창을 불러댔고, 구름들은 시시각각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저건 뭐지?” 하고 묻자, 아내는 “명태 두 마리!”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입을 똑같이 크게 벌린 명태 두 마리가 나란히 유영하며 이중창을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여자 친구였을 당시, 그녀는 끝도 없이 이상한 이야기들을 꾸며 냈습니다.
전봇대로 이빨을 쑤셨다는 둥, 빵 하고 총소리가 나자, 전깃줄에 앉아 있던 참새들 중 맨 뒤의 녀석이 누가 죽었나 내다보다가 그 총알에 맞아 죽었다는 둥, 길 가에 있는 집채만 한 바위를 가리키며 그걸 가지고 공기놀이를 했다는 둥, 그녀의 이야기는 정말 끝도 없었습니다.
인생은 시간으로 채워지고, 채워진 시간은 빈 공간뿐이지만, 그 공간 속에 추억이 담깁니다.
악보 속에 음악 없고, 시계 속에 시간 없듯이, 세월 속에 인생 없지만,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그 인생 속에 가치와 의미가 담깁니다.
아내의 몸매가 자꾸만 장모님을 닮아가는 지금 이 순간, 개울 속의 파란 돌을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한강의 말이 힘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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