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강북구 수유동. 이 조용한 주거지는 조선통신사가 심은 벚꽃부터 민주화운동의 산실인 아카데미하우스, 풀뿌리 주민 활동까지 겹겹의 시간을 품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최병구)은 수유동의 150년을 미시적으로 추적한 『수유동: 느린 도시, 살아있는 공동체』 보고서를 발간하였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보고서는 186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수유동의 변화 과정을 생활문화, 역사적 사건, 주민 주도 도시재생을 축으로 구성하여, 수유동이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 서울 원조 벚꽃 명소이자 민주주의의 상징 공간임을 밝혀냈다.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는 2007년부터 진행 중인 서울역사박물관의 대표 조사·연구 사업으로, 이번 수유동까지 총 43개 지역 조사를 완료했다.
“지명은 행정이 바꾸지만, 사람들은 기억으로 남긴다.”
‘수유리’라는 이름은 1865년(고종2)부터 등장한다. 1949년 8월 13일, 서울시 성북구로 편입된 수유리는 1950년 ‘수유동’으로 행정구역 명칭이 개편되었으나 4·19민주묘지, 아카데미하우스 등 수유리의 상징적 장소와 명칭이 결합해 고유명사화되어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유리’라는 이름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보고서는 1950년부터 2000년까지의 신문 기사에서 ‘수유리’라는 지명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분석했다. 특히 1989년과 1990년은 ‘수유리’라는 이름이 ‘수유동’보다 더 많이 언급된 시기이다. 1989년에는 4·19민주묘지와 아카데미하우스에서 평민당·민주당·전경련 관련 행사가 다수 열렸다. 1990년에는 4·19혁명 30주년 및 크리스챤아카데미 25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되며 언론 보도에 자주 등장했다.
“벚꽃의 원조는 수유동, 여의도가 아니었다.
수유동은 북한산 골짜기에 자리해 ‘수유(水逾)’, ‘빨래골’ 등 맑은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수도폭포와 구천폭포 등 빼어난 자연환경 덕분에 한때 ‘숨겨진 명승지’로 불렸고, 일제강점기에는 경성 근교의 대표 벚꽃 명소로도 이름을 알렸다. 그 기원은 무려 17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성오백년』(1926)에 따르면, 조선 후기 문신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우이동에 별장과 묘소를 두었고, 일본에 아름다운 꽃나무 이야기를 듣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벚꽃 묘목 수백 그루를 들여와 심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이동과 수유동 일대가 서울 최초의 벚꽃 명소가 되었다고 전한다.
“서울 강북의 외곽, 수유동은 민주주의의 성지로 남았다.”
수유동 산 9-1번지에 위치한 국립4·19민주묘지는 1960년 4·19혁명의 희생자 199위를 모신 곳이다. 여러 논의 끝에 1963년 9월 20일, 수유동에 약 3,000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이곳은 단순한 묘역을 넘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정신이 깃든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1960년 4월 30일 국무회의에서는 4·19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4·19학생의거기념탑’ 건립을 결정했다. 이듬해인 1961년 4월 15일, ‘사월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남산에서 묘역 조성 기공식이 열렸다. 그러나 1962년 5월 30일, 해당 부지를 시민공원으로 환원하기로 하면서 사월공원 조성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1962년 6월, 4월혁명유족회가 교외 지역인 수유동을 새로운 후보지로 제안했고, 같은 해 12월 20일 성북구 수유동 산 9-1번지에서 4월학생혁명 기념비 및 묘역 건립 기공식이 진행되었다.
1993년 4월 19일,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4·19묘역 성역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총 15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이 사업으로 묘역 면적은 4만 2,975㎡에서 13만 5,537㎡로 대폭 확장되었으며, 1993년 10월 착공해 4·19혁명 35주년을 앞둔 1995년 4월 17일에 준공되었다. 이와 동시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관리 주체도 서울시에서 국가보훈처로 이관되었다.

“아카데미하우스는 민주주의가 현실이 되기 전, 그 가능성을 실험하던 공간이었다.”
아카데미하우스는 한국 크리스챤아카데미가 독일 자본으로 건립한 본부 건물이다. 대지 6,000평에 5층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에는 호텔, 식당, 회의실 등이 마련되어 있어, 한국 현대사 속 다양한 역사적 회의의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2019년 재정 악화로 인해 매각되었고, 현재는 운영되지 않고 있다.
아카데미하우스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민주화운동 담론이 형성되던 공간이었다. ‘인간화’와 ‘근대화’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여성운동이 확장되었고, 남북 대화와 통일 문제에 대한 논의도 꾸준히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여야를 막론한 주요 정치 활동이 이루어지며 민주화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 당선인은 이곳에서 자신을 지지한 대학생·청년 조직 대표들과 식사를 함께 했고, 같은 해 5월에는 13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야당 지도자들이 모여 국회 운영 방향과 정책을 논의했다.
“속도보다 관계, 재개발보다 자치 - 수유동이 보여주는 서울의 또 다른 도시 모델”
수유동은 대규모 재개발 대신, 주민들이 마을 안에서부터 삶의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대안적 도시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고층 아파트보다 낮은 다세대주택, 오래된 전통시장, 주민이 직접 만든 커뮤니티 공간이 공존하며, 도시의 ‘속도’가 아닌 ‘관계’로 이어지는 일상이 실천되고 있다.
‘빨래골’이라고 불리는 수유1동은 1960년대 도심 철거민들이 이주해 정착한 마을이다. 2016년 서울시 도시재생 희망지, 2017년 도시재생 활성화 지역으로 선정되었고, 2018년에는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뉴딜사업 대상지, 2022년에는 우수 사업지로 선정되었다.
마을 안에서는 주민 주도의 자생 협동조합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공공 공간을 조성·운영 중이다. 대표적으로 북한산생태공원, 수유1동 마을사랑방, 수유은빛마당 등은 주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함께 사용하는 커뮤니티 시설이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두루두루배움터’는 노인과 청소년을 잇는 세대 간 연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2020년 팬데믹 이후 시작된 ‘월요노인밥상’은 노인들에게 식사와 여가를 제공하는 커뮤니티 프로그램으로 발전했다. 2025년 6월 현재까지 총 260여 회가 열렸으며, 수유1동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 강북FM 등 지역 단체와 활동가들이 함께 이끌고 있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기록은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도구”라며 “수유동의 변화는 서울 곳곳에서 진행 중인 생활 문화 실천의 좋은 본보기”라고 밝혔다.
『수유동: 느린 도시, 살아있는 공동체』보고서는 온라인 서울책방 (https://store.seoul.go.kr)에서 구매할 수 있다. (가격 25,000원, 문의 02-739-7033) 보고서에 실린 자료와 e-book은 추후 서울역사아카이브 홈페이지 페이지(https://museum.seoul.go.kr/archive)에 공개될 예정이며, 누구나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