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세계 요리 여행은 동남아시아의 섬나라 필리핀으로 향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식초와 간장, 마늘, 후추와 함께 푹 조려내는아도보(Adobo)다.
아도보는 필리핀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주 소개되지만, 이름만 보면 스페인 음식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스페인에도 ‘아도보’라는 말이 있고, 고기나 생선을 식초와 향신료에 재우는 조리법을 뜻한다.
그렇다면 필리핀 아도보는 스페인에서 건너온 음식일까?
흥미롭게도 조리법의 뿌리는 스페인 식민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본다. 필리핀은 덥고 습한 열대기후이기 때문에 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에는 고기를 오래 보관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기를 식초와 소금에 넣고 끓이거나 조리해 상하는 속도를 늦췄다. 산성 환경과 소금은 식품 보존에 도움이 됐고, 동시에 고기에 깊은 맛을 더했다.
16세기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한 뒤 현지의 이 조리법을 본 스페인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던 ‘아도바르(adobar)’, 즉 양념해 재우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아도보’라고 불렀다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이름은 스페인어의 영향을 받았지만 음식의 핵심 조리법 자체는 필리핀에서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초기의 아도보에는 오늘날처럼 간장이 들어가지 않았다.
필리핀에 중국계 상인과 이주민들의 영향이 커지면서 간장이 조리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식초와 간장의 조합이 점차 널리 퍼졌다.

오늘날 가장 익숙한 아도보는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식초, 간장, 마늘, 통후추, 월계수잎과 함께 끓여 만드는 형태다.
처음에는 국물이 넉넉하지만 오랜 시간 조리하면 소스가 점점 졸아들며 짙은 갈색으로 변한다. 고기는 부드러워지고 짭조름함과 새콤함, 마늘 향이 한데 어우러진다.
그런데 필리핀 사람들에게 “정통 아도보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하나의 답을 얻기 어렵다.
지역과 가정마다 조리법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집에서는 간장을 많이 넣어 진한 색을 내고, 어떤 지역에서는 간장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식초와 소금만으로 밝은 색의 아도보를 만든다. 코코넛밀크를 넣기도 하고 고추를 더하기도 한다.
돼지고기만 쓰는 집도 있고,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함께 넣기도 한다. 오징어나 채소를 아도보 방식으로 조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아도보는 하나의 정해진 레시피라기보다‘식초를 중심으로 재료를 조리고 보존하는 필리핀의 조리문화’에 가깝다.
아도보를 먹을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흰쌀밥이다.
진한 소스를 밥에 살짝 끼얹고 부드러운 고기를 올려 먹으면 짭조름하고 새콤한 맛이 담백한 밥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흥미로운 점은 아도보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맛이 더 깊어지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고기를 소스에 담가 두면 향이 더 배기 때문에 많은 필리핀 가정에서는 한 번에 넉넉하게 만들어 다음 날 다시 데워 먹기도 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발전한 조리법이 오늘날에는‘다음 날 더 맛있는 집밥’이 된 셈이다.
아도보는 축제나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이 아니다. 평범한 가정의 저녁 식탁에도 오르고, 도시락에도 담기며, 식당과 길거리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이 음식에는 화려한 궁정 이야기보다 가족의 냄비와 주방의 기억이 더 많이 담겨 있다.
그리고 아도보의 역사를 알고 나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음식의 이름이 곧 음식의 출생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스페인어 이름을 가졌지만 그 맛의 뿌리는 필리핀의 열대기후와 생활환경, 그리고 음식을 오래 보존하려 했던 사람들의 지혜에서 자라났다.
아도보는 외국에서 붙여진 이름 아래 필리핀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어온 조리법이 살아남은 음식이다. 식초 한 숟가락으로 고기를 지키던 생활의 지혜가 수백 년 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민요리가 됐다는 사실이야말로 아도보의 가장 흥미로운 역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