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침내 벼르고 벼르던 참꽃 군락지를 올랐습니다. 실로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요. 이곳 비슬산琵瑟山 참꽃들을 만나러 왔었던 그때가 안개 속처럼 기억의 언덕에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손가락을 꼽으며 헤아려 보니 그새 어언 십수 년의 세월이 흘러갔는가 싶습니다.
산중의 개화 시기는 어찌 그리도 변덕이 심하던가요. 그때쯤이면 으레 펑펑 피워 올렸으리라는 굳은 믿음을 안고 올랐건만, 아직 완전히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봉오리들밖에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허전했었습니다. 한데, 이처럼 산뜻하게 진분홍 화장을 하고서 한껏 자태를 뽐내는 수백만 송이의 꽃들을 대하니 얼마나 감개가 무량한지요.
고려 중엽의 이름난 시인이며 문장가였던 김황원 선생이,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 그 빼어난 아름다움을 시에다 담으려고 온종일을 애쓴 끝에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
긴 성 한쪽 면에는 넘실넘실 강물이요
큰 들판 동쪽 머리엔 띄엄띄엄 산들일세
이렇게 두 구절을 얻고는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다음 시구가 떠오르지 않아 한스러워서 통곡하며 내려왔다는 일화가 전한다지만, 이곳 비슬산 고원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참꽃 무리의 황홀한 광경을 마주하고 보니, 그런 이야기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음을 오늘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참으로 천하의 절경을 만나면, 비록 시인이 아니어도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며 통곡하고픈 심정이 되고 마는 것인가 봅니다.
눈이 시리도록 드넓게 펼쳐진 수만 평의 꽃 세상,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진분홍 향연에 머리가 어찔어찔해 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요동을 칩니다. 하늘거리는 실비단 깨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봄나들이 나온 우리의 옛 여인네들을 닮았다고나 할까요.
“우와!” 하는 감탄사 한마디를 토해내고는, 한껏 벌어진 입이 그만 다물어질 줄을 모릅니다. ‘화려하다’와 ‘화사하다’를 굳이 구별해 낼 수 있다면, 이 참꽃들에겐 화려하다기보다는 화사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한 오라기 연기도 피워 올리지 아니하고 기세 좋게 타오르는 꽃불, 그래 어쩌자고 조화주는 이 산정의 대평원에다 이토록 한꺼번에 화르르 꽃불을 질러 놓은 것일까요.
차근차근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누며 눈사진기에다 담습니다. 이제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인연을 맺을 수 있으려나, 싶은 생각에서입니다.
두고 떠나기 서운한 마음에 한 줌의 숨결을 꽃잎에다 뿌려 놓고 발길을 돌립니다. 수백만 송이의 꽃아가씨들이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일제히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 수상
유혜자수필문학상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