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이수한 기자] 경남 합천 해인사의 고요한 판전(板殿)이 최근 다시 깨어났다. 800년 전 고려 민초들이 국난 극복의 염원을 담아 나무에 새겼던 간절한 기도를 오늘날의 기술로 되살리는 ‘팔만대장경 재판각(再板刻)’ 사업이 본격화되면서다. 이번 불사는 단순히 낡은 경판을 교체하는 작업이 아니다. 훼손에 대비한 ‘제2의 대장경’을 조성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정신문화 유산을 영구히 보존하려는 국가적 대작불사다. 하지만 이 장엄한 서사의 뿌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인사에서 한반도 반대편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바로 세계기록유산의 탄생지이자, 그 거대한 역사가 잉태된 강화도 고려산(高麗山) 자락이다.

고종 왕릉(홍릉)을 지키는 800년 원찰 강화 청련사, 역사의 전면에 서다
해발 436.3m의 강화도 고려산은 매년 봄 50만 인파를 불러모으는 진달래 명소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청련사(靑蓮寺)는 화려한 꽃 잔치보다 훨씬 묵직한 역사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청련사 주지 지묵 스님은 “사찰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고려 제23대 왕 고종의 능인 강화홍릉(洪陵)이 위치한다”며 사찰의 역사적 위상을 강조했다. 고종은 1232년 몽골의 침략에 항거해 수도를 강화로 옮긴 뒤,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해 팔만대장경 조성을 주도했다. 왕릉 곁에서 왕실의 안녕과 호국의 염원을 빌었던 원찰 청련사는, 당시 대장경을 새기던 각수(刻手)들과 지휘부의 간절함이 교차하던 ‘강도(江都) 시대’의 핵심 거점이었다.
청련사가 대장경 탄생의 목격자라는 증거는 대웅전 불상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의 왼팔 옷주름에는 13세기 고려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인 ‘오메가(Ω)’ 문양이 선명하다. 두툼한 아래턱과 길게 올라간 눈꼬리 역시 당시 강화도에서 조성된 불상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안타깝게도 직접적인 문헌 기록은 사라졌으나, 학계는 이 불상을 대장경 판각이 한창이던 13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사찰 밖을 지키는 수령 700년 이상의 느티나무 보호수들 역시 역사의 산증인이다. 고종이 대장경 조성을 독려하던 그 시절부터 자리를 지켜온 이 고목들은, 800년 전 대장경판을 다듬던 각수들의 망치 소리를 기억하듯 침묵 속에 서 있다.

합천의 ‘재판각’, 강화의 ‘혼’을 다시 깨우다
해인사에서 들려오는 재판각 소식은 강화 청련사에게 남다른 울림을 준다. 800년 전 고려산 자락에서 산벚나무를 찌고 말려 칼을 대던 그 뜨거운 호국 정신이, 21세기 오늘 합천의 칼끝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묵 스님은 “청련사는 역사적 위상뿐만 아니라 고려산 진달래와 홍릉의 서사가 어우러진 포교의 명당” 이라며 “이곳에서 대장경의 시작을 되새기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라고 전했다.
울창한 대나무 숲의 서늘한 기운과 수령 700년 고목의 그늘 사이로 서해의 낙조가 내려앉는다. 강화의 거친 바닷바람을 견디며 한 자 한 자 새겨 넣었던 평화의 염원은, 이제 고려산의 바람을 타고 한반도의 등줄기를 흘러 합천 해인사의 재판각 소리로 되살아난다. 역사는 박제된 기록이 아니라, 청련사 불상의 옷주름처럼 선명하게 살아 숨 쉬는 생명력임을, 서해를 바라보는 이 고요한 순간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