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도시의 풍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워지는 존재들을 포착해, 그 이면의 구조와 관계를 시각화하는 작가가 있다. The Imaginary Pocus가 [창간특집기획연재] 아티스트 아카이브 시리즈로 만난 스물세 번째 주인공은 ‘공간을 사랑한 아티스트’ 디지털 회화 작가 e-espace이다.
그는 대상을 단순히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상의 풍경 속에서 존재가 어떻게 배경으로 밀려나고 지워지는지 그 무감각의 메커니즘을 묵묵히 가시화한다. 완결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고정된 예술가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되어가는 공간(Space of Becoming)'을 추적하고 기록하는 관찰자로 자신을 정의하고 있다.

결핍에서 시작된 질문, 보이지 않는 구조를 탐구하다
e-espace 작가의 예술은 무언가를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결핍에서 출발한다. 그는 "저에게 예술은 ‘결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물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구조와 관계가 더 궁금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피사체 자체의 외형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대상이 시야에서 어떻게 사라지는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도시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한 장면을 통해 시선의 전환을 겪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 한가운데, 폐지를 모으는 노인의 모습이 항상 함께 존재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풍경처럼 보였지만, 계속 보게 되면서 그 장면이 도시의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반복적인 관찰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상태에 주목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매체의 형식적 한계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아날로그이든 디지털이든,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보게 하느냐입니다"라며,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시선의 환기를 지향한다.
고립된 개체가 아닌, 관계로 엮인 실존의 장(場)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공간’이다. 작가는 "공간은 관계로 이루어진 장(場)입니다"라고 정의한다. e-espace(전자공간)라는 활동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전자적 현실(Electronic Reality)을 단순한 가상 세계가 아닌 실존하는 하나의 장으로 인식한다.
그곳에서는 사람과 사물, 데이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보이지 않던 구조가 형상을 드러낸다. 점과 선, 격자와 빛, 도시의 표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구조를 이루고, 그 구조는 다시 부분의 의미를 새롭게 변화시킨다.

고정된 결과가 아닌 ‘되어가는 공간(Space of Becoming)’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작가는 디지털 회화, 사진, 비디오, 설치 미술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작업을 전개한다. 그가 캔버스와 스크린 위에 기록하는 것은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되어가는 공간(Space of Becoming)"이다.
특히 <도시의 무감각(Urban Numbness)> 연작은 정돈된 도시의 표면 아래에서 반복되는 풍경들이 어떻게 한 존재를 완벽한 배경으로 밀어내는지를 예리하게 탐구한다. 작가의 메모에 적힌 "정렬된 도시의 표면 아래, 반복은 존재를 배경으로 만든다. 존재는 공간이 되고, 사람은 기능으로 축소된다"는 문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나아가 그는 "나는 빈곤을 재현하지 않는다. 나는 지워지는 메커니즘을 기록한다"라는 뚜렷한 작업관을 밝힌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배경이 되는지 체감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 더 주목하게 되었습니다"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익숙한 풍경 속에서 지워지는 구조 자체를 담담하게 드러낸다.
치열한 선택과 왜곡으로 지워짐을 시각화하다
그의 작업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지 않는다. 액션캠과 디지털 기기는 현실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렌즈가 일상의 반복되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포착하면, 작가는 디지털 과정을 통해 그 형태를 흐트러뜨리고 왜곡하여 숨겨져 있던 관계를 밖으로 끌어낸다.
이 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순간은 수많은 일상 속에서 구조가 드러나는 찰나를 선택하고, "그 장면을 그대로 두지 않고 얼마만큼 흐트러뜨릴 것인지 계속 고민"하는 사유의 시간이다. 익숙해진 시선 속에서 존재가 자연스럽게 배경으로 밀려나는 순간을 포착할 때 작가는 "어떤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가 활용하는 NFT 미디어 역시 단순한 신기술이 아닌 "작품을 보여주고 남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자 확장성"으로 작용한다. 그는 "미디어의 이해를 쓴 마샬 맥클루언이 말한 것처럼 매체는 인간의 확장이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예술도 계속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NFT는 저에게 기술이라기보다, 작업의 확장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매체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오랜 직장 생활과 글로벌 전시로 넓힌 진중한 시선
작가의 이력은 다층적이다. 오랜 기간 가장으로서 직장 생활을 이어오다 몇 년 전 전업 작가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저에게 오래된 숙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 속에서도 힘들 때마다 저는 늘 그림을 그렸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화가라고 확인해 왔습니다"라고 회고한다.
30대 초반 직장 생활 중 가족과 함께 떠난 프랑스 생테티엔 국립미술학교에서의 수학은 예술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계속 찾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해 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특히 프랑스 유학 이후 가족들은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어, 타국에 가족을 두고 작업을 이어가는 작가의 치열한 삶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조선소와 건축 현장 등에서 직접 부딪히며 삶을 바라본 시간 역시 현재 그가 삶과 도시의 구조를 관찰하는 시선의 바탕이 되었다. 2025년 STAF 단독 공간 전시와 아트강릉25 개인 부스 참여를 비롯해, 2025 New York Bridge Art Festival(뉴욕, 서울)과 2024 Hechyeomoyeo Group ART Exhibition(방콕) 등 글로벌 무대의 단체전에도 활발히 참여하며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공간, 관계, 무감각을 관통하는 세 가지 이정표
그의 궤적을 명확히 대변하는 세 점의 작품이 있다.
첫 번째 <월곡2동> (Digital Drawing, 2022, 3685 x 2431px)은 작가가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구조'로 인식하게 된 출발점이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넘어,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틀과 흐름을 바라보게 만든 이 작품을 기점으로 모든 작업의 방향이 정립되었다.
두 번째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세상> (Digital Drawing, 2024, 4032 × 2419px)은 공간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 만들어진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형태보다 '관계'의 중요성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며, 그의 철학이 구조에서 관계로 확장되었음을 증명한다.
세 번째 <폐지 001> (Digital Photography, 2025, Variable Size)은 다가올 개인전의 중심이 되는 대표작이다. 돌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폐지 유모차와 정돈된 도시 풍경의 대비 속에서, 존재가 배경으로 밀려나고 우리가 점차 익숙해지는 ‘무감각’을 단순한 기록을 넘어 고스란히 짚어냈다.
타인의 지워짐을 인식하는 시간, 개인전 <도시의 무감각>
고정된 결과가 아닌 '되어가는 공간' 속에서 지워지는 존재들을 기록해 온 작가의 철학은, 오는 4월 25일부터 4월 30일까지 열리는 동명의 개인전 <도시의 무감각(Urban Numbness)>에서 관객과 직접 교감하는 실존의 장(場)으로 펼쳐진다. 서울 강서구 아트앤갤러리에서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정돈된 일상 속에서 누군가가 배경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시각화한다.
작가는 빈곤 자체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기보다, 우리의 무감각이 만들어내는 시선과 구조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지의 흐림, 왜곡, 중첩을 통해 '보이지만 인식되지 않는 상태'를 담담하게 가시화하며, 모든 것을 품어버리는 허공을 상징하는 청색(Blue)을 무감각의 색으로 설정했다.
전시를 관통하는 관전 포인트는 두 가지다.
첫째, 익숙한 장면 속에서 놓치고 있던 존재를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 시선이다.
둘째, 존재가 배경으로 점차 밀려나는 시각적 과정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 자체를 경험하게 한다. 작가는 "이 전시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인식의 구조를 묻는 작업입니다"라고 강조한다.
아울러 "이 작업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온 그들에 대한 우리의 배려이자 감사의 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지워왔는지를 돌아보는 작업입니다"라고 그 의미를 설명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짓는 견고한 뼈대, 독서
고도화된 디지털 매체를 다루는 작가에게 창작의 상상력을 불어넣는 원천은 활자를 읽는 아날로그적 '독서'다. "저는 상상의 힘이 독서를 통해 길러진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고, 그 과정이 자연스럽게 상상력을 만들어줍니다"라고 말한다.
작업을 구상하며 헤맬 때마다 책 속에서 해답을 찾았다며,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분들과 작가분들께 독서를 권하고 싶습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라고 애정 어린 당부를 남긴다.
매체의 한계를 넘어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담다
특정한 틀이나 기법에 갇히는 것을 경계하는 작가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도 넓은 가능성을 열어둔다. "앞으로 어떤 프로젝트가 나올지 저 역시 알 수 없고, 궁금합니다. 앞으로도 반복보다 변화 속에서, 새로운 방식과 작업을 계속 만들어가고자 합니다"라며 새로운 시도를 예고한다.
현재 평면 이미지가 가진 '지워지는 과정' 표현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앞으로는 작품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함께 보여줄 수 있는 영상 및 설치 작업으로 확장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질문을 놓지 않는 태도가 곧 예술이 된다
삶이 예술이 되기를 꿈꾸며 길을 찾는 이들에게 e-espace 작가는 진중한 조언을 건넨다. "무언가를 찾으려 하기보다, 지금 계속 마음에 남는 질문을 놓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자신의 방식이 되고, 그게 곧 예술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작업을 통해 무언가를 억지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익숙하게 지나치는 장면 속에서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지워지는지를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습니다"라는 바람만을 전할 뿐이다. 인터뷰의 끝자락, 그가 남긴 한 마디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끝까지 보려는 태도가, 결국 예술이 됩니다.”
[전시 안내]
▪️전시명: 도시의 무감각 (Urban Numbness)
▪️전시 기간: 2026. 4. 25 ~ 2026. 4. 30
▪️관람 시간: 11:00 AM - 19:00 PM
▪️전시 장소: 아트앤갤러리 (서울 강서구 공항대로 219 센티니아 11층 1104호)

[아티스트 소개: e-espace (이종석)]
오랜 기간 직장 생활을 이어오며 조선소와 건축 현장 등에서 삶을 직시했고, 30대 초반 가족과 함께 떠난 프랑스 생테티엔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몇 년 전 전업 작가로 전향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전자적 현실을 '공간'으로 인식하고 디지털 회화부터 사진, 비디오, NFT 미디어까지 다채로운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다. 포트폴리오 사이트와 인스타그램,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작품 세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2025년 STAF 단독 공간 전시와 아트강릉25 개인 부스 참여를 비롯해 뉴욕과 방콕 등 국내외 글로벌 전시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끝까지 보려는 태도가 결국 예술이 된다"는 철학 아래, 익숙한 도시 풍경 속에서 누군가가 배경으로 지워지는 메커니즘을 가시화하며 고정된 결과물이 아닌 끊임없이 '되어가는 공간(Space of Becoming)'을 기록하고 있다.
[The Pocus Archive: 아티스트 아카이브 – OO을 사랑한 아티스트]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결국 인간의 마음과 상상의 힘에 있다. 본지 The Imaginary Pocus는 창간을 맞이하여 기술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과 상상 세계를 지켜가는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 [OO을 사랑한 아티스트]를 선보인다. The Pocus Archive는 앞으로도 자신만의 가치를 사랑하며 자신의 원하는 미래를 실현하는 아티스트들을 엄선하여 기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