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편집자주) 박동명 박사는 전남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 성균관대학교 국정전문대학원 행정학박사과정 수료자로서, 서울특별시의회 보건복지전문위원,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국회의정연수원 강사, 행정안전부 지방자치인재개발원 강사로 활동해 왔다. 또한 서울특별시 주민참여연구위원, 경기도 주민참여예산연구회 연구위원, 경기도 주민참여예산위원(기획행정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주민참여예산의 제도 설계와 운영, 심사기준, 우수사례를 현장에서 다루어 왔다.
주민참여예산은 지방자치의 성숙도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제도이다. 지방자치가 단순히 선거로 대표를 뽑는 데서 그친다면 민주주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민이 지역의 문제를 직접 말하고, 사업을 제안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며, 그 결과가 실제 예산으로 반영된다면 지방자치는 비로소 생활 속 민주주의가 된다. 이런 점에서 주민참여예산은 ‘좋은 제도’이기 이전에 ‘필요한 제도’이다.
주민참여예산의 본질은 예산편성 과정에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데 있다. 이것은 사후 예산감시와는 다르다. 이미 집행된 돈을 보고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 예산이 편성되는 단계에서부터 주민이 자신의 지역에 필요한 사업을 제안하고 우선순위를 논의하는 구조이다. 따라서 주민참여예산은 단순히 의견을 모으는 절차가 아니라, 행정이 독점해 왔던 편성권에 주민의 시선과 생활의 경험을 결합시키는 분권화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주민참여예산위원회 활동과 관련 강의를 통해 거듭 확인한 것도, 참여예산은 ‘민원 해결 프로그램’이 아니라 예산 편성과정의 민주화를 위한 장치라는 점이다.
이 제도의 첫 번째 특징은 생활밀착성이다. 주민참여예산은 주민이 일상에서 체감하는 불편과 위험을 가장 빠르게 공적 의제로 끌어올린다. 골목이 어두운지, 횡단보도가 위험한지, 보도가 낡았는지, 공원이 불편한지, 마을 경관이 훼손되었는지, 문화와 여가를 누릴 공간이 부족한지,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 보행약자의 안전이 보장되는지 가장 먼저 느끼는 사람은 주민 자신이다. 주민참여예산은 바로 그 체감 문제를 행정이 공식적으로 다루게 하는 제도이다. 이 때문에 주민참여예산은 언제나 생활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두 번째 특징은 공공성이다. 주민참여예산은 사적 요구를 예산으로 실현하는 통로가 아니다. 좋은 주민참여예산 사업은 다수 주민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공공목적이 분명하며, 단년도 안에 실행 가능해야 한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의 권한 안에 있어야 하고, 기존 사업과 중복되지 않아야 하며, 사업비 규모도 적정해야 한다. 반대로 개인 사유지에 대한 지원, 현금성 지원, 권한 밖의 사안, 일회성 행사성 사업, 행정 내부 운영경비 성격의 요구는 주민참여예산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 주민참여예산이 공공재원을 다루는 제도인 이상, 공공성의 기준은 제도의 생명선과도 같다.
세 번째 특징은 숙의와 조정의 구조이다. 주민참여예산은 제안을 많이 모으는 것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제안을 어떤 기준으로 심사하고, 어떤 절차로 조정하며,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하는가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운영위원회, 분과위원회 같은 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민이 제안한 아이디어는 접수 이후 검토와 조정을 거쳐야 한다. 시 전체를 위한 정책사업인지, 구 단위의 거점형 사업인지, 읍면동 생활밀착형 사업인지 구분하고, 공공성·시급성·타당성·수혜범위·예산적정성을 따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숙의 없는 참여는 감정적 요구의 나열이 되기 쉽고, 조정 없는 참여는 예산의 쪼개기로 흐를 위험이 있다.
최근 주민참여예산의 흐름은 한 단계 진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골목길 보수, 시설 설치, 소규모 환경개선 같은 하드웨어 중심의 제안이 많았다면, 이제는 도시의 지속가능성, 친환경·스마트 인프라, 보행안전, 문화복지 공간, 마을가꾸기, 공동체 기록화와 같은 보다 넓은 주제로 확장되고 있다. 이는 주민이 단순한 민원 제기자를 넘어 지역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정책 파트너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생활밀착형 사업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위에 도시의 중기적 방향과 공동체의 가치까지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런 변화는 지방의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민참여예산은 집행부만의 영역이 아니다. 주민의 요구가 어떤 방향으로 모이고 있는지, 어떤 생활권에서 불편이 집중되는지, 주민이 무엇을 가장 시급한 공공문제로 인식하는지는 지방의회가 예산심사와 행정사무감사를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의회가 주민참여예산을 단순한 집행부 프로그램으로 보지 않고, 민심과 정책수요를 읽는 창으로 활용할 때 주민참여예산은 의회와 행정, 주민이 함께 만드는 협치의 장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민참여예산을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 예산 전체 중 주민참여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제한적이고, 참여 역시 활동적인 일부 주민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며, 청년·직장인·취약계층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낮은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앞으로의 과제는 분명하다. 참여 인원 수를 늘리는 데 머무르지 말고 숙의의 깊이와 대표성을 높여야 하며, 단년도 소규모 사업에만 머물지 말고 중기적 재정계획과 지역 발전전략과의 연계성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위원 교육과 시민학습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한다. 필자가 여러 현장에서 느낀 것은, 주민참여예산은 제도 자체보다 운영의 품질과 참여자의 역량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결국 주민참여예산은 돈을 나누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주민의 경험을 공공정책으로 번역하는 민주주의의 기술이다.
행정이 놓친 문제를 주민이 먼저 발견하고,
위원회가 그것을 공공의 언어로 정리하며,
의회가 그것을 예산과 정책으로 연결할 때,
지방자치는 비로소 추상이 아니라 생활이 된다.
지방자치의 성숙은 거대한 선언에서 오지 않는다.
골목의 안전, 마을의 환경, 주민의 편의, 공동체의 문화, 도시의 미래를 주민 스스로 말하고 예산으로 연결하는 작은 과정에서 시작된다.
주민참여예산은 바로 그 시작의 제도이다.
그리고 그 제도가 깊어질수록, 지방자치도 더 단단해질 것이다.
▷법학박사,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한국정책연구원 원장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민참여예산 관련 교육 200회 실시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상임이사
▷(전)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