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마지막이 언제부터인가 ‘과정’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병실의 하얀 빛 아래, 인간은 더 이상 한 생애의 주인이 아니라 연장 가능한 ‘시간의 덩어리’로 환원된다. 우리는 그것을 돌봄이라 부르지만, 때로는 너무도 조용히, 너무도 익숙하게 인간의 존엄이 지워지고 있다. 요양원이라는 이름 아래 놓인 어떤 공간들은 마치 ‘저승길 대기소’처럼 보인다.
연명이라는 이름의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그 기술이 붙잡아두는 것은 과연 ‘삶’인가, 아니면 단지 ‘생물학적 지속’인가.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고통과 무력 속에 갇힌 채 하루를 넘기는 일, 그것을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 부를 수 있는가.
죽음을 늦추는 일은 가능해졌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그 사이에서 의료와 자본은 교묘하게 결탁하여, 죽음마저도 하나의 ‘상품’으로 길들이고 있다. 생명을 늘리는 것만큼 연장의 시간은 계산되고 계속 청구된다.
인간성의 말살은 언제나 거창한 폭력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표정한 친절, 규격화된 절차, 그리고 선택권의 박탈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진다. 환자의 이름 대신 번호가 불리고, 의지 대신 보호자의 서명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순간, 인간은 이미 자신의 죽음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삶을 지탱하던 기억과, 존엄의 감각은 하나씩 벗겨지고, 마지막에는 단지 ‘관리 대상’만이 남는다.
그러나 죽음은 원래 그렇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이 아니라, 삶의 완성에 가까운 그 무엇이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만큼이나, 어떻게 떠나는가는 중요하다. 존엄한 죽음이란, 고통을 최소화하는 기술적 문제를 넘어, 자기 결정권의 회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스스로의 끝을 사유하고, 받아들이며, 때로는 멈춤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그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자기 것으로 남겨두는 마지막 행위다.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더 오래 사는 것이 정말 더 나은 것인가, 아니면 더 잘 떠나는 것이 인간다운 것인가. 죽음을 금기시해온 사회는, 결국 죽음을 타인의 결정에 맡기는 구조를 만들어왔다. 그 결과, 가장 개인적이어야 할 마지막 순간이 가장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 요양원이 ‘저승길 대기소’라는 냉혹한 은유를 벗겨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음을 다시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존엄한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장치를 고민해야 한다.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명확한 의사 표현과 무엇보다 ‘떠날 권리’를 둘러싼 깊은 윤리적 대화가 필요하다.
삶은 끝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끝을 스스로 마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권리.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끝내 지켜야 할, 가장 인간다운 존엄이다.
“저승길 대기소보다 존엄사 휴게소로 가자”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