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하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청소년 성범죄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이다. 이 질문 뒤에는 하나의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허용의 자유’로만 이해하는 시선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틀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질문 자체가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에 가깝다. 그리고 그 거부가 실제로 가능하도록 사회가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문제는 우리가 이 권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왔다는 데 있다. ‘동의’라는 단어 하나로 복잡한 권리 구조를 덮어버렸고, 그 결과 보호가 필요한 영역까지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치해왔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서 출발한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즉 자기운명결정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권리는 애초부터 조건 속에서 작동하는 권리였다.
강요가 없어야 한다. 착취가 없어야 한다. 상대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조건이 무너지면 ‘동의’는 더 이상 자기결정이 아니다. 선택처럼 보이는 강요일 뿐이다.
특히 아동·청소년에게 이 권리는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보호의 문제다. 판단 능력과 자기방어 능력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선택은 온전한 자기결정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묻는다. 왜 법이 청소년의 선택을 제한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 질문 역시 전제가 잘못되어 있다.
법은 청소년의 선택을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착취 구조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개입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특히 13세에서 16세 사이의 청소년은 관계의 의미와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고, 상대의 의도를 착취로 인식하기도 쉽지 않다. 이 시기의 ‘동의’는 쉽게 영향을 받고 쉽게 왜곡된다.
따라서 법은 이 연령대를 보호의 대상으로 명확히 설정한다. 이는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만드는 조치다.
이 구조에서 책임은 분명하다.
청소년에게는 보호가 주어진다. 반면 성인에게는 책임이 부과된다.
성인은 단순히 법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다. 미성년자의 성을 보호하고 건강한 가치관 형성을 도울 책임을 가진다. 이는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법질서가 요구하는 의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동의가 있었다”는 말이 면죄부처럼 사용된다. 그러나 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판단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는 관계에서 ‘동의’는 쉽게 권력의 언어로 변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청소년이 ‘조건만남’이나 ‘스폰알바’ 등의 이름으로 성착취 상황에 놓이는 경우에도 법은 이를 개인의 선택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취약성을 이용한 구조적 착취로 해석한다.
그리고 분명히 말한다. 책임은 착취자에게 있고, 보호는 피해자에게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오랫동안 청소년에게 말했다. 조심하라고.
그러나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조심하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왜 보호받지 못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자유의 확대가 아니다. 위험으로부터의 거리 확보에 가깝다. 특히 청소년에게 이 권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안전의 문제다.
결국 이 권리는 개인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 사회 전체가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거부할 수 있는 구조, 거부가 존중되는 환경, 그리고 착취가 개입할 수 없는 기준을 함께 구축해야 한다.
그 조건이 없다면, 어떤 선택도 진짜 선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자유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보호의 언어다. 그리고 그 보호는 제한이 아니라 가능성의 전제다.
우리는 더 이상 ‘동의’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제는 물어야 한다.
이 사회는 정말, 누군가가 거부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김범일
• 법정교육연구소 대표
•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폭력예방통합교육 전문강사
• 경기도 비상임 인권보호관(성희롱, 성폭력 분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