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복을 벗은 뒤에도 남는 것 - 권위인가, 신뢰인가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한때 명함 한 장이면 길이 열리던 시절이 있었다. 직함은 곧 권한이었고, 권한은 곧 영향력이었다. 그러나 퇴임식 꽃다발이 시들고, 사무실 불이 꺼진 뒤에야 비로소 마주하는 질문이 있다. 나의 영향력은 직위에서 비롯된 것이었나, 아니면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나.
은퇴 공직자는 한국 사회에서 독특한 위치에 선다. 오랜 시간 공공의 영역에서 정책을 설계하고, 행정을 집행하며, 국가의 방향을 조율해 온 이들이다. 그 경험은 분명 자산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산은 ‘권한’이라는 제도적 울타리 안에서 발휘되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직위가 사라진 순간, 영향력의 근거도 흔들리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힘을 가지며, 수평적 소통이 중시되는 시대다. 이런 환경에서 과거의 위계적 권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직함보다 진정성, 권한보다 공감 능력을 요구한다. 그 결과 은퇴 공직자에게 남겨진 과제는 단순하다. 권한을 통해 행사하던 영향력을, 관계를 통해 재구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칼럼은 그 전환의 과정을 들여다본다. 권한에서 관계로 이동하는 이 여정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의 리더십 문화 전환을 상징한다.
한국 행정문화의 유산과 은퇴 공직자의 위치
한국의 행정문화는 오랜 기간 중앙집권적 구조와 위계적 조직문화를 특징으로 해 왔다. 산업화와 압축 성장의 과정에서 효율성과 통제가 우선시되었고, 공직 사회는 명확한 서열과 책임 구조를 통해 국가 발전을 이끌었다. 이는 분명 한국 경제의 도약을 견인한 동력이었다.
그러나 이 구조는 동시에 ‘직위 중심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조직 내 권한은 곧 개인의 힘이었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직급과 직책이 말의 무게를 규정했다. 이런 환경에서 수십 년을 보낸 공직자는 자연스럽게 ‘권한을 통한 리더십’에 익숙해진다.
퇴임 이후의 현실은 다르다. 직책이 사라지면 발언권도 자동으로 줄어든다. 과거에는 부하 직원이 정리해 주던 일정과 자료가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다. 정책 결정의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으로 이동한다. 이때 많은 은퇴 공직자들이 느끼는 것은 상실감이다. 사회적 위상, 네트워크의 중심성, 발언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 공직자는 여전히 귀중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정책 기획 경험, 공공 문제 해결 능력, 위기 대응 노하우,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문제는 이 자산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이상 ‘지시’할 수 없고, ‘결재’할 수 없다. 대신 설득하고, 연결하고, 조율해야 한다.
즉, 한국 사회의 변화는 은퇴 공직자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한다. 권한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로 말하는 리더십이다.
권한 기반 영향력과 관계 기반 영향력의 차이
권한 기반 영향력은 제도적이다. 직위, 규정, 법적 권한에 의해 뒷받침된다. 상대는 명령을 따를 의무가 있고, 조직은 이를 보장한다. 이 구조에서는 ‘누가 말했는가’가 중요하다.
반면 관계 기반 영향력은 신뢰에 의존한다. 상대는 의무가 아니라 공감과 존중 때문에 따르거나 협력한다. 여기서는 ‘무엇을 말했는가’와 ‘어떻게 말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은퇴 공직자가 직면하는 전환은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다. 과거에는 정책 방향을 제시하면 조직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제는 같은 말을 하더라도 설득 과정이 필요하다. 청년 창업가, 시민단체, 지역 공동체와 협업하려면 수평적 소통이 필수다.
최근 일부 은퇴 공직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기회로 삼고 있다. 지역 사회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사회적 기업 자문을 맡거나, 공공 정책 연구소에서 중재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전문성보다 태도다. 과거의 직함을 앞세우는 순간, 관계는 경직된다. 대신 경청과 조율을 통해 신뢰를 쌓는다면, 경험은 새로운 방식으로 빛난다.
관계 기반 영향력은 속도가 느릴 수 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하다. 명령으로 움직인 조직은 권한이 사라지면 흩어진다. 반면 신뢰로 연결된 네트워크는 시간이 지나도 유지된다. 은퇴 공직자가 장기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재구성의 전략: 연결자, 멘토, 중재자로서의 역할
은퇴 공직자가 사회적 영향력을 재구성하기 위한 전략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연결자 역할이다. 공직 시절 형성된 네트워크는 여전히 가치가 있다.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기업, 시민사회 간의 가교가 될 수 있다. 단, 이 연결은 권위를 앞세운 중개가 아니라 상호 이해를 돕는 조정이어야 한다.
둘째, 멘토 역할이다. 청년 세대는 정책 경험이 부족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디지털 감각을 갖추고 있다. 은퇴 공직자는 시행착오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이들의 성장을 도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르침’이 아니라 ‘동반 성장’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셋째, 중재자 역할이다. 사회 갈등이 복잡해진 시대에 공공 문제 해결 경험은 큰 자산이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현장에서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은 퇴임 이후에도 충분히 활용 가능하다.
이 세 가지 역할의 공통점은 하나다. 권한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직함이 아니라 관계망이 영향력의 근거가 된다.

관계로 재편된 영향력,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
은퇴 공직자의 전환은 개인의 적응 문제를 넘어선다. 이는 한국 사회 전체의 리더십 패러다임 전환과 맞닿아 있다. 여전히 우리는 직함에 민감하고, 위계에 익숙하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공론장은 수평적이다. 권한만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
은퇴 공직자가 관계 중심 리더십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할 때, 사회는 중요한 메시지를 받는다. 영향력은 직위가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는 메시지다. 이는 현직 공직자에게도 경고이자 조언이 된다. 언젠가 직함은 사라진다. 그 이후에도 남을 것은 사람들과 맺은 관계뿐이다.
결국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나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명령으로 움직이던 리더였는가, 아니면 사람을 연결하던 조정자였는가. 은퇴 이후에도 사회에 기여하고자 한다면, 이제는 관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권한은 임시적이지만, 신뢰는 축적된다. 그 축적이 곧 새로운 영향력이다.
은퇴 공직자뿐 아니라 모든 조직 리더에게 이 전환은 필수다. 권위가 아니라 공감, 지시가 아니라 설득, 통제가 아니라 협력이 미래의 리더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