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사랑이 지혜를 앞섭니다. 사랑이 지혜보다 중요합니다. 이런 주장을 이상주의적이니 관념론적이니 낭만주의적이니 하는 식으로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소위 키스가 사랑이라는 이념보다 더 낫다는 주장입니다. 실천이 의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몸의 현상이 생각의 본질을 앞선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도 몸을 좋아합니다. 평생을 운동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몸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좋아합니다. 거울 앞에서 제일 먼저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의 현상입니다.
하지만 현상은 늘 본질과 함께 할 때에만 의미 있습니다.
음이 양과 함께 할 때에만 극단적인 세계, 즉 태극을 만드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다만 무엇을 먼저 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함께’가 문제입니다. ‘곁을 내 주는 것’이 관건입니다. 서로가 공간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음이 양에게, 양이 음에게 자신의 곁을 내 주는 것처럼 자신이 또 다른 자신을 만나 곁을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 현상을 사랑이라 말하든 태극이라 말하든 무아지경이라 말하든 황홀지경이라 말하든 해탈이라 말하든 천국이라 말하든 상관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 때문에 생각이 방해받지 않는 그런 지경에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실수를 저지르는 대표적인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다.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려는 곳에서 실수가 발생한다. 늘 잊지 말고 명심하길 바란다. 철학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공통적으로 ‘필로소피아’라는 사실을, 그리고 필로스가 소피아를 앞서고 있다는 사실을, 사랑이 지혜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사랑의 실천이 지식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것들 모두 고통을 참고 견뎌야 가능한 일들이라는 사실을.”
나의 책,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에서 내가 한 말입니다.
사랑이 지혜를 앞선다. 이것은 나의 철학을 채운 나의 신념이고 나의 이념입니다.
철학자의 철학은 이런 말과 함께 자기만의 세상을 펼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야구장에 가면 야구하고, 축구장에 가면 축구하면 됩니다. 나와 놀고 싶으면 나를 인정하고 나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내가 만든 경기 규칙을 따라주면 됩니다. 여기서 그렇게 놀면 됩니다.
사랑은 자신의 곁을 내 주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그 흑암 같은 깊은 곳에 가라 앉아 있던 그 무엇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수면 위, 그 얇은 표면, 그토록 예민한 껍질 하나가 온몸으로 번지는 전율을, 쾌감이라 말하는 그 경지를 경험하게 해 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 주지만 또 다른 의미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 기적의 현상입니다.
사랑하려면 미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존의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창조하려면 기존의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합니다. 기존의 것을 조금이라도 따르면 모방이라고 말합니다. 모방한 것은 결코 창조물이나 창작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도 좋으면 길은 하나뿐입니다. 사랑이라는 길 하나.
하나가 전부, 전체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 그 하나가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너 있다’라는 대사를 힌두교의 말로 바꾸면 ‘타트 트밤 아지’가 됩니다. ‘타트 트밤 아시’라고 발음해도 됩니다. ‘이게 바로 너’라는 말입니다. 너를 향한 인식의 언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