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미술관장 정태궁 작가의 도비산 돌 설치미술 〈섭리(Providence)〉는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무엇을 건드리지 않았는가’를 먼저 묻게 한다. 이 작품 앞에서 관람자는 조형미보다 시간의 두께를, 작가의 의도보다 자연의 선행 질서를 먼저 감지하게 된다.

돌은 재료가 아니라 사건이다
도비산의 돌은 채집된 오브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지질의 변동, 서해의 바람과 염분, 인간의 간섭을 견딘 시간의 사건이다. 정태궁은 이 돌을 가공하거나 변형하지 않는다. 그는 창조자가 아니라 배치자로 물러난다. 이 물러섬 이야말로 〈섭리〉의 미학적 출발점이다.
‘섭리’라는 제목의 거리감
‘섭리’는 흔히 신학적 언어로 오해되지만, 이 전시에서의 섭리는 특정 신의 의지라기 보다 인간의 의도를 넘어 이미 작동하고 있는 질서에 가깝다. 돌의 위치는 우연처럼 보이되 필연처럼 느껴지고, 인공의 흔적은 최소화되지만 공간의 균형은 오히려 또렷하다. 관람자는 “왜 이렇게 놓였는가”를 묻기보다 “여기에 있어야 했던 것 같다”는 감각을 얻게 된다.
설치미술, 완결을 거부하는 형식
설치미술은 닫힌 조각이 아니다. 관람자의 동선, 시선, 체온과 호흡이 작품에 개입한다. 〈섭리〉에서 돌들은 하나의 중심을 향해 복속되지 않으며, 각각의 무게와 간격으로 느슨한 질서를 형성한다. 이 느슨함은 무질서가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유지해온 균형에 가깝다. 인간이 개입할수록 흐트러질 수 있는 균형을, 작가는 오히려 개입의 절제로 드러낸다.
장소는 배경이 아니라 조건이다
도비산은 단순한 전시 배경이 아니다. 바다와 맞닿은 지형, 전설과 신앙의 기억, 풍화된 돌들이 축적한 시간은 작품의 일부다. 이 돌들을 다른 장소로 옮겼다면 〈섭리〉는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말한다. 섭리는 이동되지 않는다. 이미 그 자리에 있다.
오늘의 예술,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섭리〉는 동시대 예술이 흔히 빠지는 과잉 개념과 과잉 설명을 거부한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인간은 세계를 설계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이미 작동 중인 세계에 잠시 참여하는 존재인가. 정태궁의 선택은 분명하다. 그는 만들기보다 드러내고, 주장하기보다 비워둔다.
섭리는 자연 앞에서 인간의 겸손을 요구하는 윤리적 제스처이자, 속도와 소음의 시대에 제안하는 하나의 미학적 태도다. 돌은 말하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관람자는 오히려 오래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이 세계의 주인인가, 지나가는 과객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