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2】
石門(석문)과 帶方(대방)은 접해 있었다
― 『삼국사』가 밝히는 결정적 단서
1. 『後漢書(후한서)』가 밝히는 대방의 위치 관계
『後漢書』 권85 동이열전에는 다음 기록이 있다. (삼국사 권 15 고구리본기 대조대왕편에도 동일기사 존재))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고구리 대조대왕 94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의
西安平을 쳐서 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았다.
이는 고구려의 침범 기사 속에 등장한다. 문맥상 帶方은 遼의 동쪽,
그리고 西安平(서안평)의 서쪽에 위치해야 함이 분명하다.
즉, 대방은 ‘바다 건너 막연한 어디’가 아니라,
요동 관련 전선(전쟁 공간) 안에서 작동하는 행정·군사 단위로 기록된다.
2. 『南齊書(남제서)』의 遼東(요동) 지명군과 帶方(대방)
『南齊書(남제서)』에는 遼東(요동)에 廣陽·朝鮮·帶方·廣陵·淸河·樂浪·城陽(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낙랑, 성양) 등이 열거된다.
이처럼 대방은 고립 지명이 아니라, 여러 지명군과 함께 동일한 공간 묶음으로 반복 제시된다.
이 지명군을 오늘날 지명 보존과 대조할 때, ‘淸河(청하)’ 등은 특정 지역을 강하게 지시하는 표지가 된다.
3. 우리 기록의 명칭: 『삼국사』
이 글에서는 우리 사서의 제호를 『삼국사』로 표기한다.
『고리사(세칭 고려사)』 인종 23년(1145) 12월 기사에 김부식이 왕에게
『삼국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단순 표기 문제가 아니라, 사료 인용의 태도와 직결된다.)
4. 『삼국사』가 제공하는 대방의 내부 지명망
『삼국사』의 백제·고구려 ※관련 기사※에는 帶方故地, 帶方王, 帶方太守(대방고지, 대방왕, 대방태수)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阿旦城·蛇城·漢城·河水·崇山(아단성, 사성, 한성, 하수, 숭산) 등의 지명들이 함께 나타난다.
이는 대방이 추상적 이름이 아니라, 성(城)·하수(황하)·산(崇山)과 엮인 생활·전쟁 공간으로 기록되었음을 뜻한다.
※관련 기사(위와 아래의 중복 기사는 제외)※
① 溫祚王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 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 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에 대방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이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는데 나라를 帶方故地대방고지에 세웠다."고 하였다.
② 責稽王
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旦城蛇城 備之
고구리가 帶方대방을 치므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말하기를,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할까 염려하여 아단성과 사성을 수리하며 대비하였다.
③ 蓋鹵王
遣使朝魏 ~ 謹遣龍驤將軍 帶方太守 司馬 張茂 等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 등을 위에 사신으로 보냈다.
蒸土築城 ~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 於阿且城下戕之
흙을 쪄서 성을 쌓고 ~ 사성의 동쪽부터 崇山의 북쪽까지 하수(한수)를 따라 제방을 쌓았다. 北城북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서 南城남성을 공격하였다. ~ 阿且城아차성 아래로 보내 죽였다.
5. 결정적 기록: 石門之野(석문의 들) ↔ 帶方之野(대방의 들)
『삼국사』 김유신전에는 다음 구절이 있다.
「唐軍與靺鞨營於石門之野 王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營於帶方之野」
당군은 말갈과 함께 석문의 들에 진을 치고,
왕(문무왕)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대방의 들에 진을 쳤다.
당군과 말갈이 石門석문의 들에 진을 치고, 신라군이 帶方의 들에 진을 쳐 대치했다는 뜻이다.
이는 “대방이 어디쯤이었을 것”이라는 추정과 차원이 다르다.
石門과 帶方이 서로 접해 있는 전장(戰場) 공간이었음을 직접 증언한다.
이 한 문장은 대방 비정 논증에서 사실상 결정타다.
6. 결론: 帶方(대방)의 표기는 ‘石門接帶方(석문접대방)’이 가장 합리적이다
한족(화하족)의 정사(『三國志』·『後漢書』·『南齊書』(삼국지, 후한서, 남제서))가 제시한 조건들과,
『삼국사』가 제공한 전쟁 공간 기록을 함께 교차하면, 帶方은
太行山脈(태항산맥) 동부의 공간 체계 안에 있고, 安平의 서쪽 관계를 만족하며
무엇보다 石門과 접하여 대치가 성립했던 지점으로 비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방을 한반도 내부로 고정하는 주장은 사서 정합성의 기준에서 재검토되어야 하며,
대방의 표기는 **‘石門接帶方(석문과 대방은 맞닿아 있다)’ 또는 ‘석문 지역의 대방’**이 가장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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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왜 굳이 倭(왜)를 ‘동이의 일부’로 보아야 하는가?
A. 『三國志』에서 倭人傳은 별도의 “외국사”가 아니라, 명백히 「東夷傳」 내부에 편제되어 있다.
이는 편찬자의 세계 인식에서 倭가 동이 세계 내부의 한 구성 요소로 인식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倭의 위치·해로·방향 서술은
동이 세계의 기준점인 帶方과의 상대적 공간 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사서 체계에 부합한다.
Q2. 대방을 한반도 내부로 비정하면 왜 문제가 되는가?
A. 그 비정은 『三國志』·『後漢書』·『南齊書』가 제시하는
遼(요)의 동쪽,
安平(안평)의 서쪽,
石門과의 접경 관계,
江淮·會稽(강회, 회계)와의 방향성
을 동시에 만족시키지 못한다. 특히 『삼국사』 김유신전에 기록된
“石門之野 ↔ 帶方之野”의 대치 관계는 한반도 내부 비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Q3. 石門 기록 하나만으로 위치를 단정해도 되는가?
A. 단일 기록이 아니라, 여러 사서가 쌓아온 조건 위에 놓인 결정적 기록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미 한족 정사가 방향·영역·지명군을 제시했고,
『삼국사』는 그 위에 전쟁이라는 현실 공간을 얹어 놓았다.
石門 기록은 추론의 출발점이 아니라, 교차 검증의 종착점이다.
▣ 보강 결론
사서를 종합하면 帶方은
太行山脈(태항산맥) 동부의 공간 체계 안에 있고,
安平의 서쪽이라는 상대 위치를 충족하며,
무엇보다 石門과 접해 실제로 군대가 대치했던 공간으로 기록된다.
이는 한족의 正史와 『삼국사』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공간을 지시한 결과다.
따라서 대방의 표기는 **‘石門接帶方’ 또는 ‘石門 지역의 帶方’**이 가장 합리적이며,
이를 벗어나는 비정은 사서 정합성의 기준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