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선고된 의왕 스마트시티 퀀텀 지식산업센터 사건(2024가합19501) 판결은 분양·부동산 재판의 기준이 어디까지 무너졌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판결이 남긴 메시지는 단순하다. 입주예정일은 절대적인 약속이 아니며, 피해자의 문제 제기는 오히려 사업자의 면책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분양 피해자들이 체감하는 사법의 현실과 법원의 판단 사이의 간극은 그 어느 때보다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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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입주일은 추후 통보”… 약속은 기준이 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계약서에 ‘정확한 입주일자는 추후 통보한다’는 문구가 있다는 이유로, 입주예정일이 수개월 변경된 사안을 계약 위반이나 해제 사유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분양계약에서 입주예정일은 단순한 참고사항이 아니다. 자금 조달, 사업 계획, 임차 계약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핵심 계약 요소다. 그럼에도 법원은 이를 사업자가 조정 가능한 변수로 해석했고, 결과적으로 수분양자의 해제권은 형해화됐다.
민원은 권리인데, 판결은 ‘불가항력’으로 만들었다
더 큰 논란은 사용승인 지연의 원인을 수분양자들의 민원·고소 제기로 돌린 대목이다. 재판부는 이를 사업자의 귀책이 아닌 ‘불가항력’으로 인정했다. 문제 제기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다. 그러나 이 판결은 그 권리를 사업자 면책을 위한 근거로 전환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침묵하지 않으면, 오히려 기업이 보호받는 역설적 구조가 만들어졌다.
산업집적법의 취지는 어디로 사라졌나
지식산업센터는 본래 공장·업무시설을 전제로 한 제도다. 주거 전환과 투기화를 막기 위해 산업집적법이라는 강행 규범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입주자격 제한 조항의 존재만을 강조하며, 실제 사용 실태나 분양 과정의 유도 구조를 거의 심리하지 않았다. 법의 목적은 지워지고, 형식만 남았다. 그 결과 산업집적법은 탈법을 막는 장치가 아니라, 사후 면책을 돕는 문구로 전락했다.
판결의 공통분모: 기업은 무과실, 국민은 전부 귀책
이 판결을 관통하는 구조는 명확하다. 기업은 공정·불가항력·계약 문구를 이유로 대부분 면책되고, 국민은 서명했고, 문제를 제기했고, 시기를 놓쳤다는 이유로 책임을 떠안는다. 이는 단일 사건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논리가 반복될수록 분양사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계약서 문구를 더 정교하게 설계한 사기만 늘어난다.
그래서 다시, AI 재판부를 묻는다
문제의 본질은 결론이 아니라 기준의 부재다. 왜 몇 달의 입주 지연은 허용되는가. 왜 민원은 불가항력인가. 왜 유사 사건과의 비교는 이뤄지지 않는가. 판결문은 답하지 않는다. 이 침묵이 사법 불신을 키운다.
여기서 AI 재판부 논의가 나온다. AI 재판부는 판사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다. 판결에 이르기까지의 법리·판례·편차를 공개적으로 비교·제시하는 설명의 장치다. 유사 사건에서 어떤 기준이 적용됐는지, 이번 판결이 어디에서 벗어났는지를 한눈에 보여줄 수 있다. 판사의 재량은 존중하되, 그 재량의 이유는 기록되고 검증돼야 한다.
사법은 더 이상 기업의 리스크 관리 도구여서는 안 된다
입주예정일이 기준이 아니고, 민원이 불가항력이라면, 분양 피해자는 어디서 보호받아야 하는가. 사법이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면, 피해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설명 가능한 재판, 기준이 보이는 판결 없이는 신뢰 회복도 없다.
이번 판결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지금의 사법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그 신호를 외면할 것인지, 아니면 기준을 다시 세울 것인지—선택의 시간은 이미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