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어느 날 그는 빗방울이 전선에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한꺼번에 바꾸었다. 그러니 정말 흥미 있는 이야기는 그 뒤에 비로소 시작되지만, 일단 이 이야기는 그가 전선의 빗방울을 보기 전까지이다.”
한강의 〈어느 날 그는〉이라는 단편을 시작하는 구절입니다.
늘 글을 읽을 때마다 시작은 다른 부분보다 더 오랜 시간을 두고 읽으려 합니다.
다시 시작! 이 말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꿰찰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대지를 바라보기도 하고 바다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하늘, 땅, 바다, 이렇게 시선이 바뀌는 순간마다 이해의 폭은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안경을 바꿔 쓸 때마다 현상이 달라지는 그 느낌과 같습니다.
현상은 다양합니다.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깨닫지 못합니다.
깨달음은 어떤 형식으로든 시간 속에서만 주어집니다.
‘어느 날’이 시점을 형성합니다. 불특정한 시간대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무엇으로 변신합니다. 이런 말이 지닌 힘을 맛봐야 합니다.
삶은 산다고 다 삶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도 보낸다고 다 시간 보내기가 실현되는 것도 아닙니다.
고행은 힘든 일을 자처하는 일입니다. 싫은 일을 굳이 찾아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인식을 얻습니다.
인식의 다른 말은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무방합니다. 어느 날 그는 깨달았습니다, 라고.
인식했다, 깨달았다,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둘 다 나름대로 의미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존재는 생각의 형식 속에서 생각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관건입니다.
살면서 몇 번이나 깨달았나요?
나무가 나이테를 형성하듯이, 양파가 껍질을 형성하듯이, 그렇게 삶도 생각의 내용과 형식으로 나름대로 존재의 폭을 넓혀갑니다.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스스로 확장시켜 나갑니다.
무엇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까? 무슨 생각까지 해낼 수 있습니까? 누구의 인생관과 세계관까지 섭렵해 보았습니까?
요즈음 나는 한강의 글 속에 푹 빠져 지내고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저녁 햇살에 되비치는 전선을 자주 바라봤습니다. 전선이 빛난다는 것은 저녁이 되어가고 있다는 신호였고, 그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인식이 요구되었습니다. 가끔은 그런 식으로 거미줄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때가 되면 노는 것도 마무리를 해야 했습니다. 친구들과도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단 며칠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 속의 그 며칠은 영원처럼 아득합니다.
가족들이 모두 서울로 떠난 시점이었습니다. 그 며칠 후에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습니다. 아니 막내형도 있었지만 그는 중학생이라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밤늦게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집에 간다는 것은 그때 그 당시에는 절망의 순간이었습니다.
긴 시간의 존재를 경험했습니다.
‘자, 지금부터다!’ 나는 이 말을 정말 좋아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는 말을 꺼내놓을 수 있는 순간까지가 문제입니다. 김두한의 선배, 쌍칼이 구마적과 대결을 앞둔 전날 저녁 이런 말을 꺼내놓습니다. “싸우기 전까지가 문제다”라고.
변화의 시점은 전과 후에 대한 인식이 수반됩니다. 달라져야 할 대목을 깨닫는 것입니다.
앞과 뒤는 다릅니다. 앞과 뒤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과 뒤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죽어갑니다. 소중한 시간을 아깝게 보내다가 허무한 인생의 쓴맛을 체험하며 마지막을 받아들입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며 나는 독서에 임합니다.
인식은 느닷없이 다가와 모든 것을 바꿔놓습니다. 신비로운 일입니다. 생각의 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