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의 하루에서 ‘놀이’가 사라질 때 벌어지는 일
장애나 발달문제를 가진 영유아를 돌보는 부모는 매일 새로운 과제를 마주한다. 언어치료, 행동치료, 감각통합, 특수교육… 아이의 잠재력을 키우기 위해 이런 치료를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치료로 가득 찬 하루 속에서 아이는 ‘놀 시간’을 충분히 갖고 있을까?
발달지연을 가진영유아들은 최상의 결과를 위해 “하루 8시간, 주 5일, 총 40~44시간의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는 설명”이 있다. 발달지연 아동이 여러 치료를 받으며 반복된 과제를 수행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묻는다. 아이는 치료받아야 할 ‘대상’이기 전에, 놀 권리를 가진 ‘사람’이 아닌가?
UN 아동권리협약 제31조는 “어린이는 충분히 쉬고 충분히 놀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장애 영유아는 놀이보다 치료가 우선순위가 되기 쉽다. 아이의 발달을 진정으로 돕는 것은 ‘치료의 양’일까, 아니면 ‘놀이의 질’일까? 놀이는 단순한 여가가 아니다. 놀이는 아이의 정서와 관계, 사고 능력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아이의 성장 기반은 ‘말’보다 먼저, ‘놀이’ 속에서 자라난다.
놀이가 아이의 발달을 이끄는 방식 — 뇌·감정·관계의 과학
네덜란드의 문화학자 요한 하위징아(Huizinga)는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Homo Ludens)”라고 말했다. 그는 놀이가 문화의 시작이며, 인간 발달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자료집에서도 놀이의 본질을 “아동의 마음 흐름”이라고 설명한다. 즉, 놀이는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활동이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탐색하고, 조작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자발적 경험이다. 발달신경학 연구는 이를 뚜렷하게 뒷받침한다.
뇌 발달: 영유아기 놀이 경험은 감각–운동–정서 회로를 통합하며 전두엽 기능 발달을 촉진한다(Shonkoff & Phillips, 2000).
언어 발달: 상징놀이 능력은 언어 이해·표현 능력과 직접적 상관을 가진다. 언어보다 먼저 세상을 ‘표상’하는 연습이기 때문이다.
사회·정서 발달: 놀이 중 상호작용은 감정 조절과 타인 관점 이해 능력을 키운다.
특히 발달문제를 가진 영유아는 자발적 경험의 빈도와 질이 부족해지기 쉽다. 반복적 행동, 감각 예민성, 관심 전환의 어려움 등은 스스로 놀이를 만들고 확장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이때 필요한 개입이 바로 놀이치료다. 놀이치료는 놀이 속에서 아이의 상태를 평가하고, 발달 단계에 맞춘 상호작용을 통해 아이가 스스로 놀이를 확장하도록 돕는다. 다시 말해, 아이가 “놀 수 있는 아이”가 되도록 기반을 만들어 주는 과정이다.
놀이치료가 핵심인 근거
“진짜 놀이”와 “가짜 놀이”를 구분하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가짜 놀이는 어른의 욕구를 따르는 활동이고, 진짜 놀이는 아이의 마음 흐름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한다(p.8–9). 이는 세계적 놀이치료 이론과 정확히 일치한다.
전문가가 말하는 놀이치료의 효과
Axline의 아동중심 놀이치료(Child-Centered Play Therapy, CCPT)
아이의 자기표현·자기조절 능력을 향상시키며 불안·분노 감소에 효과적이며, 발달지연 아동에게 특히 ‘관계 기반 안정감’ 형성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축적됨.
DIR/Floortime (Greenspan & Wieder)
발달문제 아동이 상호작용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단계라고 주장하며, 꾸준한 놀이 기반 개입은 언어·사회성 발달을 촉진한다는 연구가 다수 보고됨.
Neuroconstructivism 연구(Thomas & Karmiloff-Smith)
발달은 기능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통해 뇌가 스스로 재구조화되는 과정임을 주장한다. 즉, 놀이 경험은 뇌 발달의 ‘재료’이며, 치료도 놀이를 기반으로 할 때 효과가 커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때, 예전에는 특수시설 아이들이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손이 묶인 채 생활하기도 하였고, 감각 자극에 예민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외출조차 어려운 부모도 존재한다. 이것은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놀이 경험의 상실이 아이에게 어떤 정서적·감각적 어려움을 유발하는지를 상기시킨다. 놀이치료는 이런 조건 속에서 아이가 안전하게 자기표현을 하고, 감각적·정서적 긴장을 완화하며, 발달적 기반을 회복할 수 있는 장치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놀이치료는 기술 훈련이 아니라, 아이의 신경발달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환경’ 자체다.
아이의 발달을 바꾸는 놀이치료의 핵심 원리
발달문제를 가진 영유아에게 놀이치료가 왜 필수적인지 논리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아이의 발달은 ‘정서적 안전감’에서 시작된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영유아기 뇌는 ‘위협 상태’에 있을 때 학습과 발달을 거의 하지 못한다(Perry & Szalavitz, 2006). 놀이치료는 아이에게 실패가 없는 공간, 통제감을 느끼는 경험, 수용받는 관계를 제공한다. 이는 전두엽 발달의 전제조건이며, 감정 조절능력을 안정적으로 성장시키는 기반이 된다.
② 반복과 모방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즐거움’을 회복시키는 과정이다
부모 마음의 욕망이 앞서는 가짜 놀이는 아이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 발달문제를 가진 많은 영유아는 상호작용보다 물건 조작이나 반복 행동에 오래 머무른다. 놀이치료는 아이의 현재 관심을 존중하면서도 치료사가 조심스럽게 관계를 확장해 상호작용의 기쁨을 다시 느끼게 한다. 이는 사회성 발달의 핵심인 “공유 주의(joint attention)” 능력의 기초다.
③ 언어보다 먼저 ‘상징 능력’이 자란다
언어는 상징 체계다. 상징놀이가 약한 아이가 언어 발달에 어려움을 보이는 이유는 언어가 늦어서가 아니라, 상징 능력의 기반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이치료는 물건 → 행동 → 상징 → 역할놀이로 이어지는 발달 단계에 맞추어 아이의 상징능력을 강화한다.
④ 놀이치료는 다양한 치료의 ‘중심 축’ 역할을 한다
행동치료, 언어치료, 감각통합 등은 각각 중요한 역할이 있지만, 이 치료들이 효과를 내려면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상호작용에 열려 있는 상태여야 한다. 놀이치료는 그 기반을 만든다. 즉, 놀이치료가 잘 작동한 아이는 다른 모든 치료의 효과도 상승한다.
⑤ 발달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발달을 ‘다시 열어주는 것’
발달문제를 가진 영유아는 잠재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잠재력을 펼칠 수 있는 경험의 루프가 막혀 있는 상태다. 놀이치료는 이 루프를 열어주어 아이가 스스로 발달을 확장해 나가는 길을 열어준다.
아이의 미래는 놀이에서 시작된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발달문제가 있는 영유아에게 놀이치료는 선택이 아니라, 발달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 조성’이다. 우리가 아이를 돕고 싶다면, 아이의 하루 속에서 “놀아도 되는 시간”, “자유롭게 실수할 수 있는 공간”, “천천히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관계”를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놀이치료는 부모가 줄 수 없는 전문적 기반을 제공하면서도,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방식(부모-아동 놀이, 상호작용 패턴, 감정 조율 방법)까지 함께 안내한다. 결국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우리는 아이가 더 많은 치료를 받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더 잘 자라도록 도울 것인가? 아이의 마음은 말보다 먼저 자란다.
그리고 그 마음은 놀이 속에서 가장 잘 자란다. 아이의 발달이 잠시 멈춘 듯 보이는 순간에도, 놀이만은 아이를 앞으로 데려가는 조용한 엔진이다. 부모와 전문가 모두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아이의 성장 경로는 다시 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