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가끔 박물관이나 콘서트홀을 거닐며, 인간이 빚어낸 '문화'의 정수(精髓) 앞에 서곤 한다. 완벽한 조화의 교향곡, 영혼을 울리는 듯한 명화, 시대를 꿰뚫는 철학적 사유. 세상은 이것을 '문화'라 부르며, 이 문화의 힘이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이 화려한 문화의 이면에서, 나는 인류가 겪어야 했던 가장 참혹한 비극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기독교 문화는 과연 안녕하십니까?"
주님은 시간과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명백히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제도(System)가 아닌 하나님의 제도를 따르라고. 세상의 옛 전통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이다 (엡 4:22-24).
"과연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수십 년간 내 몸에 익어버린 이 낡은 사고와 습관을 정말 벗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질문 이전에, 우리는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를 먼저 직면해야 한다.
인류의 실험실: '문화'는 왜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는가?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문화적 실험실'이었다. 모든 사람은 더 좋은 세상을 원했다. 그 신념을 위해 평생을 바쳤고, 목숨까지 내어놓았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더 좋은 세상'을 시도했다.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이념으로 유토피아를 꿈꿨다. 어떤 이들은 군사적 무력으로, 어떤 이들은 외교와 정치적 타협으로, 또 어떤 이들은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의 '인간 이성'을 숭배했다.
한때 인류는 착각 속에 살았다. 인간을 '교육'하고, 선행을 '가르치고', 낡은 제도를 '바꾸고', 환경을 '개선'하면, 이 세상이 마침내 지상낙원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 없이, 인간 자신의 철학과 사상으로 완벽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인류 역사상 가장 '문화적'으로 세련되었던 나라, 베토벤과 칸트의 후예들이 모인 바로 그 땅에서, 인류 최악의 야만인 아우슈비츠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문화'가 인간의 '죄성'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증명하는 거대한 기념비였다.
우리는 이 피의 교훈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교육이나 환경이 인간을 바꾸지 못한다. 만약 교육 수준이 인간을 변화시킨다면, 선진국의 흉악 범죄율은 후진국보다 압도적으로 낮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인간의 선행이나 도덕률은 결코 인간의 탐욕스러운 심장을 변하게 할 수 없다.
결국, '죄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는, '죄인들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문화는 죄성의 뿌리를 가리는 세련된 포장지였을 뿐, 그 뿌리를 잘라내지 못했다.
'진정한 기독교 문화'라는 이름의 오해
그렇다면, 이 실패한 세상 문화와 구별되는 '진정한 기독교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종종 길을 잃는다. 혹자는 그것을 서구 유럽의 클래식 음악이나 경건한 종교화, 혹은 교회의 오랜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문화'가 아니라, '기독교화된 서구 문화'일 뿐이다. 진정한 기독교 문화는 특정 지역의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문화요,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문화, 즉 '천국 문화(Heavenly Culture)'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장 고통스러운 자기 고백과 마주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 문화'는 과연 '천국 문화'인가? 아니면 그저 세상의 옛 전통과 구습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화석화'된 것은 아닌가?
우리는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 대신, '오래된 종교적 습관'이라는 낡은 옷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진리의 본질이 아닌, 예배의 순서와 형식이라는 '구습'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이 우리에게 벗어버리라고 명하신 '옛사람'(엡 4:22)은, 단지 세상의 죄악된 습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경건해질 수 있다고 믿는 우리의 모든 '종교적 구습'까지 포함한다.
문화의 '건설'이 아닌, 존재의 '변화'
세상은 인간의 '내면'을 바꾸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면 해답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여기에 해답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나은 문화'를 만들라고(Make) 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가 되라고(Be) 명령하셨다.
진정한 기독교 문화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어떤 '결과물(Product)'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향기(Aroma)'이다.
교회는 바로 이 '새것이 된 사람들', 즉 '새로운 피조물'이 모인 공동체여야 한다. 교회는 '천국 문화의 축소판(Microcosm of Heaven)'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세상의 그 어떤 문화 공간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하늘의 공기'가 느껴져야 한다는 뜻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평화, 세상의 조건을 초월하는 이유 없는 기쁨, 죄와 율법과 '낡은 구습'으로부터의 완벽한 자유.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나, 우리의 영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연결되어 있음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체험하는 곳.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 문화이다. 옛사람의 기질과 죄성이 성령의 불로 녹아내리고, 이전 것은 지나가 '새 사람'이 되어버린 존재들이 모여 서로를 섬기는 곳.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낡은 옷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여러분의 기독교 문화는 안녕하십니까?" 만약 우리의 교회가, 나의 신앙이, 이러한 하늘의 평화와 기쁨, 자유와 변화의 능력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문화'라는 이름의 낡은 옷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 2절)
세상은 또 다른 '문화'를 기다리지 않는다. 세상은 '변화된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의 사명은 '기독교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명은, 내 안에 뿌리박힌 옛 전통과 옛 사고, 그 썩어가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기독교 문화'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