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한국은 ‘디지털 의료제품법’을 시행했다. 하드웨어 중심이던 기존 의료기기 규제체계를 넘어, AI·데이터·디지털 융합기기를 포함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법이다. 천안 혁신플랫폼 융합컨퍼런스에서 KDI 채단비 전문위원은 이 법을 중심으로 AI 의료기기 산업의 현주소와 정부 정책의 실행 방향을 짚었다.
그의 발표는 “기술보다 제도, 제도보다 실행”이라는 메시지로 요약된다. 법은 만들어졌지만, 아직 산업이 돌아가기 위한 ‘현장의 언어’로 바뀌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의료기기는 더 이상 단순한 진단과 치료의 도구가 아니다. AI 기반의 진단 보조, 환자 모니터링, 데이터 분석 등 디지털 서비스형 의료기기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OECD를 비롯한 주요국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해 의료기기를 “AI·디지털 기술이 결합된 진단·치료·건강지원 기기”로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한국도 이에 발맞춰 ‘디지털 의료제품법’을 독립 법률로 제정해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채 위원은 강조한다. “규제를 완화하는 법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단순한 인허가 제도 개선을 넘어, 데이터 품질관리·표준화·인증체계까지 아우르는 거버넌스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AI 의료기기의 경쟁력은 데이터에서 나온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 데이터 소유와 활용을 둘러싼 이해관계 충돌로, 국가 차원의 통합 체계가 미비하다. 채 위원은 “AI 의료기기 산업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평가·인증·데이터 생태계”라고 지적했다. 불완전한 데이터는 불완전한 의료결정을 낳는다. 따라서 데이터의 품질·투명성·표준화는 AI 의료기기의 신뢰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인력이다.
AI 의료기기 분야는 전문 인력의 부족과 불균형이 심각하다. 데이터 분석가, 의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디지털 헬스케어 기획 전문가 등 새로운 직종이 빠르게 생겨나고 있지만, 대학과 병원, 산업 현장은 이 인력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스탠퍼드대의 연구에서도, AI 확산 이후 신입 인력의 단순업무는 감소하고 경력직의 데이터 활용 업무는 증가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결국 AI는 사람을 대체하지 않고 ‘의료 결정을 돕는 동반자’로 자리 잡을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의료인이 AI를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일이다.
채 위원은 “디지털 의료제품법은 완성형 법이 아니라, 실행형 생태계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법의 가장 큰 한계는 개인정보보호법·의료법 등과의 충돌, 그리고 데이터 처리 표준 부재다.
중앙집중형 규제 구조 역시 지방정부의 혁신 실험(Test Bed) 역할을 제한하고 있다. AI를 학습할 실사용 데이터를 지역이 직접 확보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또한 중소기업 입장에서 AI 규제는 ‘지원’이 아니라 ‘부담’이 될 수 있다. 인증비용, 데이터 구축비, 행정 절차가 모두 높은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와 지자체는 소규모 제조사의 규제 대응 역량을 높이는 행정적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AI 의료기기는 기술보다 현장 데이터와 신뢰성 확보가 관건이다. 이를 위해 채 위원은 “지역 실증 허브(Local Testbed)” 모델을 제안했다. 지자체, 대학병원, 스타트업이 연계되어 지역 의료데이터를 공동 구축하고, 공공 의료기관 중심의 교육 플랫폼을 운영하며, AI 안전성 검증과 책임보험제도를 실험하는 구조다.
특히 AI 오작동 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한 AI 책임보험제의 도입이 필요하며, 의료윤리위원회, 보험제도, 정부의 규제 샌드박스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채 위원은 발표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법은 다 만들어졌다. 이제 남은 건 ‘실행’이다.”
AI 의료기기 산업의 미래는 데이터 거버넌스, 인력양성, 그리고 지역 실증 생태계의 삼각축 위에서 결정될 것이다.
정책의 목적은 제도적 완성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작동 여부에 있다.
AI 의료기기는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의료·기술·윤리·정책이 교차하는 국가적 과제다. 한국이 진정한 의료 AI 강국으로 나아가려면, 기술보다 사람과 제도, 그리고 실행의 힘을 믿어야 한다.
윤교원 대표 / The K Media & Commerce, kyoweon@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