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톤에서 피카소까지, 도시가 철학을 품을 때 창의성은 꽃핀다
부산은 오래도록 바다와 산업의 도시로 불려왔다. 그러나 그 표면을 걷어내면 부산은 사유의 도시, 질문의 도시다. 플라톤이 아테네의 거리에서 대화를 통해 철학을 세웠듯, 부산의 골목은 늘 물음으로 가득했다. ‘이 도시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부산의 언덕과 항구를 따라 흘러온 것이다.
오늘날 도시의 경쟁력은 기술력이나 자본이 아니라 ‘이야기와 철학’이다. 스토리텔링이 없는 도시는 방향을 잃는다 – 철학이 없는 창의성은 표류한다. 부산이 다시 빛나기 위해서는 철학을 도시의 언어로, 사유를 창조의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
플라톤은 도시를 ‘정의가 구현되는 공간’이라고 했다. 도시의 건물과 거리, 광장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관이 형성되는 ‘공동체적 사유의 틀’이다.
부산 역시 그러하다. 항구는 물질의 이동로인 동시에 사상의 교차로였다. 조선 시대의 동래읍성, 일제강점기의 피란수도, 그리고 오늘날의 국제영화제까지 — 부산은 늘 ‘현실의 혼란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도시’였다.
이 철학적 긴장감이 부산을 단순한 경제도시가 아닌 창의적 실험의 현장으로 만든다. 부산의 도시정체성은 ‘변화의 철학’을 품은 도시, 즉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사유의 도시다.
부산의 골목에는 ‘작은 철학’이 살아 있다. 감천문화마을은 ‘색채와 기억의 철학’을, 초량 이바구길은 ‘삶의 흔적과 사유의 길’을, 영도 흰여울마을은 ‘경계와 자유의 철학’을 품는다.
이 공간들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서사가 살아 있는 도시의 사상체계다.
스토리텔링은 이 철학을 시민과 예술가, 방문객이 공유하는 언어로 바꾼다. 철학적 스토리텔링이란, 도시의 장소를 통해 인간 존재를 묻는 행위이다.
부산의 창의성은 이러한 ‘철학적 스토리텔링 구조’ 속에서 피어난다. 예술가의 상상력과 시민의 기억이 철학의 토대 위에서 이어질 때, 도시는 자신을 이야기할 힘을 얻는다.
피카소는 스페인의 항구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바다의 빛과 색, 인간의 고뇌가 그의 예술의 근원이었다.
그가 부산의 바다를 보았다면 어떤 색을 그렸을까?
아마 그는 감천의 계단과 초량의 언덕 위에서 ‘파편화된 근대와 인간의 내면’을 읽었을 것이다.
피카소가 그러했듯이, 부산의 창의성은 철학에서 출발한다.
형태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사유의 실험, 그것이 부산의 예술적 DNA다.
바우하우스가 철학과 예술, 산업을 결합해 새로운 미학을 제시했듯, 부산도 바다와 철학, 예술을 융합하는 창의적 플랫폼 도시로 진화하고 있다.
도시의 정체성은 ‘생각의 깊이’에서 나온다. 부산이 진정한 창의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철학이 행정과 정책, 예술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철학하는 도시’란, 단지 박물관과 미술관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시민이 사유하는 도시, 질문하는 도시를 의미한다.
플라톤이 말한 ‘좋은 도시’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함께 토론하는 도시였다.
부산이 그 길을 걷는다면, 피카소의 붓과 플라톤의 사유가 이 도시의 하늘 아래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 부산은 진정한 창의성의 꽃을 피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