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우리'라는 말 속에 참으로 많은 것을 담는다. '우리나라', '우리 집', '우리 가족'. 이 끈끈하고 따뜻한 단어 속에 기대어,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문득, 이 따뜻한 '우리'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차갑고 견고한 '벽'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수년 전, 국내 어느 도시에서 10대 청소년들이 1시간 넘게 베트남 출신 이주 노동자를 집단 폭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의 이유는 "불법체류자 같아서"였다. SNS에 유행처럼 번지는 '불법체류자 신고 방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청소년의 일탈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둡고 낯선 '민낯'이다. 우리는 이 병든 행동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제노포비아(Xenophobia)', 즉, '외국인 혐오증'이다.
이 혐오의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질문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린 비명이다.
필요가 빚어낸 260만의 이웃
우리는 지금,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다. 저출생과 고령화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그들'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2004년, 불과 75만 명이었던 국내 체류 외국인은 20여 년 만에 260여만 명으로 불어났다. 전체 인구의 4.37%. 통계적으로 '다문화 사회'의 문턱(5%) 바로 앞이다.
이것은 더 이상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K-컬처의 붐을 타고 전문 인력과 유학생의 유입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2018년 16만 명이던 유학생은 작년 19만 명을 넘어섰다. 아시아의 젊은이들에게 '코리아'는 매력적인 땅이 되었다.
파도는 이미 우리 발목을 넘어 허리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 파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손'이 필요한가, '삶'이 필요한가?
지금까지 우리의 정책은 철저히 '산업'과 '경제'의 논리에 갇혀있었다. 2004년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그 상징이다. 이 제도는 특정 업종에 '단순 기능 인력'을 '일시적으로' 할당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들의 '손'이 필요했을 뿐, 그들의 '삶'을 초대한 적이 없다."
이 차가운 전제는 비극을 낳는다. 기업은 숙련된 노동자를 장기간 붙잡아 둘 수 없어 발을 구른다. 노동자는 더 오래 일하고 싶지만, 제도의 벽에 막혀 '불법'의 그늘로 숨어든다.
최근, 정부는 구인난에 시달리는 산업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외국인 근로자 쿼터를 대폭 늘리고 장기근속 특례를 신설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정책에서 '사람'의 체온을 느끼기 어렵다. 여전히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한 '경제적 처방'에만 급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민 정책을 총괄하는 정부의 목소리도 다르지 않다. "비자 정책은 국익의 영역이다." 이 말은 지독히도 실용적이며, 동시에 지독히도 비인간적이다. 이주민은 우리의 '국익'을 위한 도구인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부품'인가?
국가와 기업이 이주민을 '필요'라는 이름의 경제적 도구로만 볼 때, 사회 구성원들 역시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이방인'으로 보게 된다. 포천의 청소년들이 보여준 제노포비아는, 어쩌면 국가가 먼저 그들에게 가르쳐준 '구분 짓기'의 가장 폭력적인 발현일지 모른다.
유럽의 실패, 우리의 경고
한 사람이 오는 것은, 한 사람의 노동력이 오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문화가, 언어가, 종교가,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이 함께 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이 수십 년간 겪은 처절한 실패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그들 역시 '손님 노동자(Gastarbeiter)'라는 이름으로 노동력만 수입하려 했다.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준비, 즉 '사회 통합'의 밑그림 없이 문부터 열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 그리고 결코 섞이지 못하는 '게토(Ghetto)'의 탄생이었다. 그들의 제노포비아는 이미 사회를 마비시키는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는 지금, 이주민을 '필요'에 의해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웃'으로 받아들일 준비는 전무하다.
'우리'라는 견고한 성벽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망설이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닫게 하는가.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헤이르트 호프스테더의 개인주의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100점 만점에 18점을 기록했다. 미국 91점, 일본 46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수치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집단주의' 사회라는 뜻이다.
우리의 집단주의, 즉 '우리'라는 의식은 기적의 원동력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국가 부도 위기에서 '금 모으기 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 이 강력한 '우리' 의식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가장 무거운 족쇄가 되고 있다.
우리의 '우리'는 너무나 견고해서, 그 안에 속하지 못한 '타자'를 배척한다. '우리나라'라는 말은 외국인들에게 가장 큰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단어라고 한다. 그 말 속에서 그들은 영원히 '손님'일 뿐, '주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런 배타적인 시선과 문화가 바로 제노포비아가 자라나는 토양이다. 그리고 이 혐오의 토양은 포천의 10대 청소년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이주 노동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그 아이들은 우리 사회가 가진 '혐오'의 시선을 그저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다.
비빔밥의 꿈: 문을 열기 전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조화로운 다문화 사회를 '샐러드 볼(Salad Bowl)'에 비유한다. 모든 재료가 녹아 하나가 되는 '멜팅 팟(Melting Pot)'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유지한 채 어우러지는 모습이다.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고 완벽한 비유가 있다. 바로 '비빔밥'이다.
한 그릇의 비빔밥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울림'이다. 쌉싸름한 도라지는 그 맛을 잃지 않고, 아삭한 콩나물은 그 식감을 유지하며, 향긋한 미나리는 그 향을 그대로 품는다. 고추장은 이 모든 재료를 억누르거나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재료가 가진 본연의 맛을 더욱 빛나게 하며, 참기름의 고소함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조화를 이뤄낸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다문화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제노포비아는 이 비빔밥을 망치는, 가장 폭력적인 '편견'의 재료이다.
우리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인구 절벽 앞에서 생존을 위해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우리'라는 성벽 안에 갇혀 서서히 고사할 것인가.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우리는 문을 열어야만 한다.
그러나 문을 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적극적인 이주민 정책에 앞서, 사회 통합을 위한 밑그림이 먼저 그려져야 한다. 혐오(제노포비아)가 아닌 존중, 적대가 아닌 환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들을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이자 '이웃'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각자가 속한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경제 정책보다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문을 아무리 활짝 열어도 이주민들이 꺼리는 나라가 될 것이다. 아니, 더 끔찍하게는, 서로서로 증오하는 '압력솥' 같은 사회가 될 것이다.
비빔밥의 조화는 재료를 억지로 뭉개는 데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 당신의 '우리'는, 그 경계선을 어디까지 허물 준비가 되어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