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날짜, 네 개의 이야기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비추는 11월 11일의 다층적 풍경
11월 11일은 한국 사회의 다층적 얼굴을 비추는 상징적인 날이다. 젊은 세대의 사랑을 상징하는 ‘빼빼로데이’가 있고, 땅의 가치와 노동을 기념하는 ‘농업인의 날’이 있으며, 걷기의 가치를 되새기는 ‘보행자의 날’, 그리고 자유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추모하는 ‘유엔참전용사 추모의 날’이 겹쳐 있다. 이날은 표면적으로는 달콤한 초콜릿 과자가 오가는 날이지만, 철학적으로 들여다보면 ‘인간의 삶이 어떻게 타자와 세계를 기억하고 관계 맺는가’라는 질문이 깃들어 있다.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처럼, 이날은 각자의 삶 속에서 행위의 윤리를 묻는 날로 재해석될 수 있다.
빼빼로데이는 한국의 소비문화가 만들어낸 상징적 현상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상업적 이벤트로 자리 잡은 이 날은, 들뢰즈가 말한 ‘욕망의 생산’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한다는 명목 아래 상품을 주고받으며, 그 행위를 통해 정체성과 관계를 재생산한다. 이는 단순한 상업행위를 넘어, 사회가 만들어낸 집단적 리듬의 일부이다. 사랑의 의미가 상품으로 번역되는 이 현상 속에서 현대인의 고독과 소통 욕망이 동시에 드러난다.
농업인의 날은 인간이 땅과 맺는 관계를 되새기게 하는 날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를 ‘거주함(Dasein)’으로 정의했다. 그는 인간이 세상 속에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관계 맺으며 세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농부는 그 철학의 구체적 구현자이다. 농사는 단순한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자연과 공존하며 생명의 순환을 유지하는 행위다. 이날은 산업화된 사회가 잊고 있던 ‘흙의 윤리’를 다시 불러오는 날이기도 하다.
보행자의 날은 도시 속 인간의 존엄과 공공의 가치를 일깨운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활동적 삶(vita activa)’이라 부르며, 공공영역에서의 행위가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 했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를 되찾는 행위이다. 보행자의 날은 도시의 중심에 인간을 다시 세우는 날이며, 자동차 중심의 문명에 대한 윤리적 저항의 의미를 지닌다. 걷는 사람의 권리가 보장될 때, 사회는 진정으로 민주적 공간이 된다.
유엔참전용사 추모의 날은 전쟁의 기억을 통해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시간이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 윤리의 근원을 설명했다. 그에게 타자는 내가 결코 지배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 얼굴을 마주할 때 비로소 윤리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전쟁의 참혹함은 인간이 타자의 얼굴을 잃을 때 벌어지는 비극이다. 이날의 추모는 단순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책임과 연대의 윤리를 되살리는 실천이다.
11월 11일은 단순한 기념일의 집합이 아니다. 이날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네 가지 축—사랑, 노동, 이동, 기억—이 교차하는 날이다. 소비와 생명, 걷기와 기억은 각각 다른 영역이지만, 모두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묻는다. 칸트가 말한 ‘도덕법칙 안의 별이 빛나는 하늘’처럼, 이날은 일상의 한가운데서 인간의 도덕성과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철학이 일상으로 스며드는 날, 11월 11일은 대한민국의 문화적 자화상이자 윤리적 거울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