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을 향한 우리의 편견

-중동 땅은 그 모든 정치적 격동 이전에, 인류의 가장 근원적 질문이 태동한 문명의 요람이다.

-중동을 비롯한 많은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정체성'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며, '혈연'이고 '운명'이다.

-오해의 장막을 걷고, 편견의 렌즈를 내려놓고, 그 샘의 깊이를 들여다보려는 시선이야말로, 지금 가장 절실히 필요한 '평가'의 기준이다.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중동 땅의 가치와 평가: 편견의 장막을 걷고 역사를 마주하다

 

세상은 중동을 '분쟁'과 '석유'라는 두 개의 렌즈로만 바라본다. 뉴스의 헤드라인은 언제나 충돌, 대응, 그리고 변화의 소용돌이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 땅을 획일적인 '문제적 공간'으로 규정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이 땅은, 그 모든 정치적 격동 이전에,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 태동한 문명의 요람이다. 인류 최초의 도시가 세워지고, 최초의 법전이 기록되었으며, 인류사를 지배해 온 거대한 사상들이 태어난 곳이다.

 

이 땅의 진정한 가치는 이 복잡성 그 자체에 있다. 우리가 가진 획일적인 판단과 오해의 틀을 걷어내지 않는 한, 우리는 중동의 민낯을 결코 마주할 수 없다.

 

첫 번째 편견: "중동은 곧 아랍이며 이슬람이다"

 

가장 깊고 오래된 편견은 중동을 하나의 거대한 '아랍-이슬람' 세계로 묶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중동의 지도를 펼쳐보면, 이 땅은 단일한 색이 아닌 수많은 민족과 언어가 직조된 복잡한 태피스트리이다.

 

물론 아랍(아랍어) 민족이 가장 넓은 지역에 분포하지만, 이 땅의 역사적 주역은 언제나 다채로웠다. 찬란한 제국을 건설했던 페르시아(이란어) 민족,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인인 튀르크(터키어) 민족, 그리고 고대의 역사를 이어온 유대(히브리어) 민족이 이 땅의 거대한 축을 이룬다. 여기에 나라 없이 수천 년을 버텨온 메데의 후예, 쿠르드(쿠르드어) 민족까지 더하면, 중동은 최소 5대 민족과 언어가 경합하는 다층적인 공간이다.

 

종교적 편견은 더욱 심각하다. 이슬람이 7세기에 역사 전면에 등장했지만, 이 땅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종교들의 고향이다. 세계 3대 고등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가 바로 이곳에서 태동했다.

 

이슬람의 물결이 휩쓸기 훨씬 이전부터, 이 땅의 원주민들은 그들만의 신앙을 지켜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집트에는 전인구의 10%가 넘는 1,500만 명 이상의 콥틱(Coptic) 기독교인들이 2천 년의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지에는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정교회 공동체들이 이슬람 문화권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공존한다.

 

우리의 편견은 심지어 '언어'에까지 미친다. 대표적인 예가 '알라(Allah)'라는 호칭이다. 많은 이가 '알라'를 이슬람만의 신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이슬람이 탄생하기 수백 년 전부터, 아랍어를 사용하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유일신(하나님)을 부르던 고유한 아랍어 단어였다. 지금도 아랍 기독교인들의 성경은 "태초에 '알라'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한다. 이는 중동의 종교 지형이 정복과 배제가 아닌, 공존과 혼합의 역사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두 번째 편견: "석유가 없었다면 미개했을 땅"

 

또 다른 편견은 중동을 '사막', '유목민', '무지'의 이미지로 가두는 것이다. "저들이 석유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떠한 문명도 세우지 못했을 미개한 민족"이라는 시각이다.

 

이는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석유가 인류의 동력이 되기 수천 년 전, 이 땅은 세계 문명의 심장이었다. 인류 최초의 도시 '우르'와 '우루크'가 숨 쉬던 메소포타미아(현재의 이라크)가 바로 이곳이다. 인류 최초의 문자(쐐기문자)와 법전(함무라비 법전)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거대한 문명의 교차로였으며,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어진 '이슬람 황금기'는 인류 지성사의 정점이었다.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바이트 알 히크마)'에 모인 학자들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수학(Algebra), 화학(Chemistry), 의학, 천문학의 기틀을 닦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유럽의 르네상스는 불가능했거나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석유는 이 고대 문명 위에 아주 최근에 덧칠해진, 어쩌면 '불행한' 자원일 뿐이다. 이 땅의 진정한 가치는 땅 밑의 검은 황금이 아니라, 수천 년간 쌓아 올린 인류의 지적 유산에 있다.

 

세 번째 편견: "정체성은 선택의 문제이다"

 

중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그러나 가장 오해하기 쉬운 지점은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다.

 

서구적 개인주의에 익숙한 우리에게 '정체성'(종교, 사상, 신념)은 후천적인 '선택'의 영역이다. 사회학자 랄프 린턴의 구분처럼, 우리는 학교, 직업, 정당 등 자신의 자유의지로 소속 집단을 결정한다.

 

그러나, 중동을 비롯한 많은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정체성'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선천적'인 것이며, '혈연'이고 '운명'이다.

 

내가 어떤 종교를 가졌는가는 "나는 무엇을 믿는다"라는 개인적 고백 이전에, "나는 어느 가문, 어느 부족, 어느 공동체에 속해있다"라는 사회적 선언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중동의 모든 갈등을 오해하게 된다. 무슬림에게 종교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 식으로는 '정치적 견해'를 바꾸라는 권유처럼 들릴지 모르나, 그들에게는 "당신의 아버지를 부인하고, 당신의 가문을 배신하며, 공동체를 파괴하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것이 수니와 시아의 갈등이 1,400년간 지속되는 이유이며, 수많은 소수 민족과 종교 공동체가 '국가' 이전에 '공동체'의 보호를 우선시하는 이유이다. 그들에게 '개인'은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하며, 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보이지 않는 장벽, '전해 들은' 지식

 

이 견고한 공동체적 정체성은 또 다른 특성을 낳는다. 바로 '전해 들은 지식'에 대한 강한 의존이다.

 

우리 사회가 개인의 비판적 사고와 텍스트 분석을 중시하는 반면, 중동의 많은 전통 사회는 공동체의 원로, 부모, 그리고 종교 지도자로부터 '구전(口傳)'된 지식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이는 그들이 문자를 모르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다. 공동체의 유대와 전통의 권위를 개인의 이성보다 우위에 두는 문화적 특성이다.

 

문제는 이 '전해 들은' 지식이 종종 강력한 편견과 오해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서구는 타락했다", "타 종교는 열등하다", "우리의 적은 저들이다"와 같은 구전된 명제들은 비판적 검증 없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견고한 장벽이 된다.

 

하지만, 이 비판의 화살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돌아온다. 우리 역시 중동에 대해 얼마나 '전해 들은' 지식(뉴스 헤드라인, 영화 속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는가. 우리 또한, 그들을 '테러리스트', '광신도', '사막의 유목민'이라는 편견의 틀에 가두어 놓고, 그 장벽 너머의 진짜 모습을 보려 하지 않는다.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사막이 숨기고 있는 샘

 

중동의 가치는 석유 매장량이나 지정학적 위치로 평가될 수 없다. 이 땅의 진정한 가치는 인류 문명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미래가 응축된 '복잡성' 그 자체에 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중동'이라는 단어에서 분쟁과 사막의 이미지만 떠올린다면,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이 땅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지혜와 가장 깊은 정체성의 고민, 그리고 가장 격렬한 공존의 역사가 숨겨진 샘이다. 오해의 장막을 걷고, 편견의 렌즈를 내려놓고, 그 샘의 깊이를 들여다보려는 겸손한 시선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평가'의 기준이다.

 

작성 2025.11.11 00:48 수정 2025.11.11 09:22

RSS피드 기사제공처 : 중동 디스커버리 / 등록기자: 김요셉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해당기사의 문의는 기사제공처에게 문의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