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의 디모데후서 1장 심층 강해를 바탕으로, 바울의 마지막 편지에 담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부르심을 통해 영원 전의 은혜와 목회자의 고독, 오네시보로의 헌신을 대비하며 오늘의 기독교 정체성과 믿음의 본질을 탐구한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디모데후서 1장을 통해 고대 감옥의 냉기를 오늘의 자리까지 가져온다.
사도 바울이 차가운 로마 감옥에서 남긴 이 마지막 편지의 첫 호흡은, 개인적 유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신학적 유산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라는 서두는 단지 예의 바른 인사가 아니다. 장재형
목사의 독법에서 이 문장은 바울의 자기 정체성, 곧 사도직과 복음 사역 전체를 떠받치는 기초 문장이다. 그는 바울이 자신의 생애를 ‘나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규정함으로써, 교회가 무엇으로 시작하고 무엇으로 완성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고 말한다. 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의 표어인 ‘마이 웨이’식 자기 구성과 반대편에 선 선언이다. 인간이 자기 방식으로 길을
낸다고 말할 때 바울은 “나는 부르심을 따라 왔다”고 말한다. 이 대조야말로 디모데후서 1장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과제인
이유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인사말 뒤에 배치된 ‘그리움의 문장들’을 주목한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라.” 감옥과 처형의 소문이 오가던 시대에, 사도와 제자의 끈끈한 유대는 단순한 감정 교류가 아니라 복음 공동체의 생존 방식이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단순한 사역 파트너가 아니라 복음의 계승을 위해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 안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상기시키고, 그 믿음이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흘러왔음을 환기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신앙의 전승이 제도만으로 보존되지 않고 인격의 사슬을 통해 흘러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학은
책과 제도로만 쌓이지 않는다. 눈물과 기도, 사도의 확인과
제자의 순종, 할머니와 어머니의 신실함 같은 구체적 인물의 역사 속에서 보존되고 갱신된다.
이어지는 1장 6절과 7절에서 바울은 디모데 안에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표현을 사역의
본질을 밝히는 핵심 구절로 읽는다. 은사는 바울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안수는 인간적 권위의 주입이 아니라 성령의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하는 도화선이다. 이때 성령이 주시는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다. 능력은
무력화를 깨뜨리는 담대함이라면, 사랑은 공동체를 떠받치는 헌신이며, 절제는
불의와 혼란 앞에서 내면을 붙드는 영적 자기통제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삼중의 덕목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요구의 실제적 토대를 이룬다고 해석한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능력, 고난을 동반하는 사랑, 끝까지 길을 지키는 절제가 있을 때 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생존하는 것을 넘어 성숙해진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하는 것은 ‘고난 그 자체의 미학’이 아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조처럼,
바울은 고난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가 요청하는 것은 복음과 함께 하는 고난이다. 다시 말해, 복음이 전해지는 자리에서 피할 수 없이 발생하는 저항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너는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기서 부끄러움의 제거가 먼저다. 로마제국의 조롱과 동시대 신자들의 이탈 앞에서,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기 신세를 ‘치욕’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확신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신앙의 영속성이 개인의 결의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뿌리를 둔다는 사실을 길게 조명한다. 은혜(카리스)는 조건 없는 선물이지, 우리의 공로나 경력을 교환하는 대가가 아니다. “영원 전”이라는 표현은 예정론의 건조한 도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을 말한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이 떠날 가능성까지 감당하신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인간의
보상 행위가 아니다. 사랑을 끝까지 품으신 하나님의 의지에 동참하는,
은혜의 방식이다.
장재형 목사는 디모데후서 1장의 후반부에서 ‘지킴’이라는 동사를 반복해서 읽어 낸다.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여기서 바른 말과 아름다운 것은 교리의 문장만을 뜻하지 않는다. 선포된 복음, 공동체에 맡겨진 진리의 전승, 그리고 그 진리를 살아 낸 사람들의 기억이 함께 포함된다. 주목할
점은 이 지킴의 주체가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키지만, 실제로 지켜 내시는 분은 성령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사역의 역설로 설명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릇을 붙든다. 그러나 그릇이 깨지지 않도록 보전하는 능력은 우리 손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보존하심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불안과 과로의 동력으로 달리지 않는다. 대신 성령의
내재하심에 기대어 책임 있게, 그러나 초연하게 길을 간다.
바울은 배신과 헌신의 이름을 같은 장에 나란히 적는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오네시보로의 집이 받게 될 긍휼을 간구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비를 신학적 논증의 장치로만
읽지 않는다. 그는 이름이 기록되는 것의 무게에 주목한다. 신앙의
역사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인격과 기억을 대표한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두려움과 체제 순응의
이름으로 남는다. 반면 오네시보로는 사슬에 매인 사도를 “부지런히
찾아” 격려한 사람, 감옥과 수치의 상징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사람,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오네시보로의 이름이 오늘의 설교에서 반복되는
까닭은, 교회가 누구의 흔적을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공개적 표명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목회자의 고독과 동역자의 배신을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교회는 언제나
두 가지 이름 사이에서 정체성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혼란의 시대일수록, 교회는 배신의 이름을 잊고 헌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그것이 “그 날”에 긍휼을 구하는 길이며, 미래의 교회가 소생할 수 있는 기억의 경제다.
바울의 2차 투옥은 1차
가택 연금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첫 번째는 관계와 선교를 지속할 여지가 있었지만, 두 번째는 황제의 광폭한 박해 아래 철저히 고립된 상태였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냉혹한 감옥이 신학의 진실을 더 날카롭게 드러내는 무대였다고 본다. 환경이 무너질수록
신학은 메아리로 남지 않고 결단으로 변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 매뉴얼’을 들려주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정체성과 복음의 본질을 요약해 넘긴다.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둘로스)”이라 부르고, 몸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스티그마)”을 말한다. 종과 흔적, 이
두 단어는 사도권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복음에 묶인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하는 언어다. 장재형 목사는 현대 그리스도인이 대면해야 할 질문을 여기서 꺼낸다. 우리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가 지닌 소유, 성취, 팔로워 수로 정체성을 구성하는 시대에, 바울은 낙인과 소속으로 자기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명령은 나의 소유를 지키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나의 소속을 확인하는
고난이다. 그 고난은 야심이 아니라 충성의 다른 이름이다.
이 모든 논의는 실제 공동체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될까. 장재형 목사는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겪었을 두려움과 피로를 가정한다. 로마의 박해가 심해지고, 주변 지도자들이 잠적하거나 떠나 버릴 때, 남아 있는 목회자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낙관이 아니다. 바울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은혜를 선행시키고, 그 은혜가
부여한 은사와 부르심을 재점화하라고 한다. 거기서 능력과 사랑과 절제가 솟는다. 이 세 낱말은 오늘의 교회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능력은 성공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의지의 지속, 진리의
선포를 멈추지 않는 담대함이 능력이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다. 사슬에
매인 자를 찾아가고, 낙오자를 일으키며, 재난의 현장에서
교회를 움직이게 하는 실천이다. 절제는로, 격한 시대정신에
휩쓸리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는 영적 근력이다. 이 삼박자가 맞아 떨어질 때, 교회는 외압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내적 소진 속에서도 방향을
상실하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는 또한 ‘지킴’의
윤리를 교회의 지적·영적 생태계 전반으로 확장한다. 바른
말과 아름다운 것을 지킨다는 것은, 복음의 요체를 문화 전쟁의 슬로건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가 쉽게 분노하고 쉽게 단정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성령의 인도 아래 진리를 조급함 없이 해석하고, 사랑과 절제의 리듬 속에서 공동체적 합의를 형성해야
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긴 것은 승리의 통계가 아니라 신실함의 습관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의 변심을 기록하면서도 오네시보로의 이름을 더 길게 기억한다. 공동체의 갱신은 실패의 목록이 아니라 충성의 사례에서 온다. 교회가
영문 밖으로 나아갈 용기를 회복하려면, 오네시보로를 기억하는 훈련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오늘의 대학생과 청년 사역 현장에서 이 메시지는 특히 선명하다. 불확실한
진로, 과잉 경쟁, 비가시적 박해와 조롱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일은 오래 참는 소수의 인내를 요구한다. 장재형 목사는 디모데후서 1장의
언어를 오늘의 언어로 번역한다. 소속의 확신에서 정체성이 나오고, 은혜의
선행에서 사명의 지속이 나온다. 그러니 먼저 은혜를 묵상하라. ‘영원
전’의 사랑이 내 삶을 먼저 안았음을 기억하라. 다음으로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라. 중단했던 기도와 말씀, 멈췄던
봉사를 재점화하라. 그리고 스스로를 두렵게 만드는 조롱과 실패의 경험을 부끄러움으로 읽지 말라. 부끄러움을 제거하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오며,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바른 말과 아름다운 것을 지키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오네시보로의 길을 따라가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부지런히 찾아’가고, 사슬의 자리를 기꺼이 방문하라. 그때 교회는 논쟁으로 설득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기억으로 설득하는
공동체가 된다.
디모데후서 1장은 사도의 은퇴사가 아니라 교회의 유산 목록이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이 장을 역사적 회고나
감상적 미화로 소비하지 않고, 오늘의 제자도를 결정하는 좌표로 재배치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마지막까지 명료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명료함을
감옥의 바닥에서 꺼냈다. 맑은 수사가 아니라 얼룩진 현실에서 나온 문장들이었기에, 그의 말은 시대를 넘어선다. 바울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요청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울린다. 영원 전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여, 두려움 대신 능력과 사랑과
절제를 선택하라. 바른 말과 아름다운 것을 성령 안에서 지키며, 배신의
이름 대신 헌신의 이름을 기억하라. 그렇게 우리가 오네시보로의 발걸음을 잇는 날, 교회는 다시금 복음의 길로 정렬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우리도 바울과 함께 담대히 고백할 것이다. 우리가 믿는 자를 우리가 알고, 우리가 의탁한 것을 그가 능히 지키셨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