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가 디모데전서 4장을 중심으로 진리 수호와 경건 훈련, 권위와 권위주의의 분별, 말·행실·사랑·믿음·정절의 본, 읽기·권면·가르침, 은사와 안수의 균형을 대학생 수준의 어휘로 유기적으로 해설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목회서신을 목회 사역의 원리로 재번역하듯 읽어 내리면서, 특히 디모데전서 4장을 오늘 교회의 심장부를 드러내는 텍스트로 제시한다. 그의 시각에서 이 장은 단순한 도덕 교훈이나 신앙 에세이가 아니라, 혼탁한
시대의 교회가 무엇을 먼저 붙들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실무 매뉴얼에 가깝다. 바울이 젊은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의 복잡한 현실 한복판으로 파송했을 때, 그가 디모데에게 요구한 것은 화려한 이벤트 운영 능력이나
즉흥적 카리스마가 아니었다. 장재형 목사는 거기서 목회의 첫째 목표를 읽는다.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 곧 교회의 터를 지키는 토목공사의 비유처럼
끝까지 버텨 내야 하는 ‘진리의 변증’이다.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사랑을 진리의 대체재로 오해하지 않도록 경고한다. 사랑이 진리를 희석하는 순간, 교회는 감정의 연대처럼 보이지만 기준을
잃고 흔들린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을 거칠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장재형 목사는 진리를 변증하되, 그 변증이 사람을 살려 내는 방식으로,
복음의 중심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때 변증은 논쟁을 이기는
재주가 아니라, 성도를 미혹에서 건져 내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키려는 목회적 돌봄의 한 형식이 된다.
그는 디모데전서 1장이 보여 주는 바울의 긴장, 곧 거짓 교사들의 이설과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분별을 오늘의 환경과 연결시킨다. 정보의 과잉, 알고리즘이 분노를 장사하는 플랫폼,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계발 콘텐츠들이 뒤섞인 시대에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신학적 소양과 교리적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은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삶을 재구성하는 기준이며, 기준은 위기에서만 진가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학문적 엄밀성과 영적 분별력을 동시에 길러야 한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이 서로의 빈틈을 메우고, 목양 현장에서의 통찰이 강단 위 설교의 근육을 만들며, 성도들의 질문이 교회의 교재가 될 때, 진리 수호는 차갑지 않고
사랑은 흐리지 않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진리 수호를 목회의 전부로 축소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 4장은 곧바로 경건의 훈련으로 시선을 돌린다.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는
일이 성도들의 마음을 움츠리게 만드는 공포 정치로 변질되면 안 된다. 목회는 두려움을 자극해 복종을
얻어 내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교육학이다. 그는
경건을 금욕의 표정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애착, 말씀을 향한 친근감, 예배를 향한 설렘과 준비, 일상의 작은 정직과 친절이 반복되어 만들어 내는 인격의 향기다. 그래서
주일 성수는 단순한 출석 체크가 아니라 경건 훈련의 핵심 무대가 된다. 예배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만남이며, 음악이나 설교의 감상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서로를 확인하는 은혜의 자리다. 예배를 기다리며 조금 일찍 도착해 찬양으로 마음을 고르고, 감사의
언어를 준비하며, 자신의 생각을 잠잠히 정돈하는 작은 습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물임을 장재형
목사는 상기시킨다. 오래된 시편의 통찰이 말하듯, 정결한
마음에서 솟아나는 찬양은 때로 가장 값비싼 제물보다 더 향기로운 순종이 된다. 이런 미세한 습관들이야말로
신자의 내면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재구성한다. 근육이 매일의 반복 운동으로 강화되듯, 경건도 일상의 반복을 통해 체질화된다.
바울이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단지 내면의 평안이라는 추상적 효용을 말하지 않았다. 장재형 목사는 이 문장을 오늘의 경쟁과 피로의 문화 속으로 가져와 읽는다. 육체의
훈련이 당장의 컨디션을 다듬어 준다면, 경건의 훈련은 욕망의 질서를 재배치하고 결정의 방향을 바로잡는다. 하루를 기도로 여는 습관, 업무 한가운데서 짧게라도 말씀을 되뇌며
마음의 불빛을 켜는 훈련, 재정과 시간에서 하나님 몫을 미리 구별해 두는 절제는 금생과 내생을 동시에
겨냥하는 실천들이다. 그는 마태복음의 시험 장면을 상기시킨다. 떡, 곧 물질적 풍요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 가치로
군림하는 순간, 떡은 시험이 된다. 성도는 떡을 무시하지도
신격화하지도 않는다. 성도는 말씀으로 산다.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는 사람은 번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번영의 종이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경건은
착한 행실의 장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떠받치는 생태계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디모데전서 4장에서
“명하고 가르치라”는 바울의 단호한 어조에도 주목한다. 그리스어 παραγγέλλω(parangel·lō)가 품은 뉘앙스는 군대의 명령과 같다.
그는 이 단어를 과도한 군사화의 언어로 끌고 가지 않으면서도, 리더가 방향을 분명히 하고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결단의 말투로 말해야 함을 강조한다. 진짜 권위는 고압적 목소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권위는 먼저 진리에 복종한 사람의 눈빛에서 나오고, 사랑
때문에 단호해질 줄 아는 사람의 표정에서 나온다. 여기서 젊은 지도자의 현실이 드러난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는 바울의 말은 단지 나이에 대한
편견을 넘어, 경험주의의 자존과 권위에 대한 상처가 뒤얽힌 조직의 심리 구조를 겨냥한다. 젊은 지도자는 흔히 자신을 증명하려는 조급함에 끌린다. 목소리를
높이고 권한을 과시하며,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든다. 장재형
목사는 이 유혹을 분명히 경고한다. 권위는 지켜야 하지만 권위주의는 배격해야 한다. 권위는 외부에서 강요되는 힘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라나는 무게이며, 권위주의는
그 무게가 부족할 때 외부로 끌어다 붙이는 장식이다.
내부의 무게를 형성하는 길로 바울은 말, 행실, 사랑, 믿음, 정절이라는
덕목을 제시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다섯 가지를 오늘의 언어로 세밀하게 풀어낸다. 말은 단지 전달 수단이 아니다. 혀는 인생의 방향타다. 빠르게 흘러가는 메시지 창, 반응을 부르는 짧은 문장들, 논쟁을 키우는 댓글 문화 속에서 리더의 말은 더 무겁게 작동한다. 사실을
말하되 상처를 남기지 않는 기술, 사랑을 말하되 진실을 잃지 않는 용기, 침묵과 발언의 때를 구별하는 분별은 훈련으로만 얻어진다. 행실은
설교보다 오래 설교한다. 회의에서의 태도, 갈등을 다루는
방식, 약자를 대하는 눈빛, 실패를 고백하는 담대함이 교리문답보다
선명한 교재가 된다. 사랑은 무비판적 수용이 아니다. 사랑은
죄를 덮어 가리는 게 아니라 죄인을 일으킨다. 미움의 습관과 조급한 판단, 소문에 기대는 편의는 사랑을 훼손한다. 리더는 사랑을 전략으로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체온으로 유지하는 사람이다. 믿음은 모두가 흔들릴 때 드러난다. 위기의 골짜기에서 리더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해석을 선택하고, 공동체가
겪는 어둠을 성숙의 통로로 읽으며, 기도와 순종으로 길을 연다. 정절은
구시대적 금기 목록이 아니다. 정절은 사역의 신뢰를 지키는 안전장치이며, 성령의 임재를 담는 그릇의 상태다. 온라인 사생활, 재정의 투명성, 관계의 경계, 권력의
사용법을 정직하게 점검하는 리더만이 하나님의 손에 안전하게 들린다. 디모데후서의 “깨끗한 그릇” 비유가 오늘의 리더십 윤리를 비춘다.
이 덕목들이 직조하는 인격 위에 바울은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이라는 실천을 얹는다. 장재형 목사는 공적 성경 낭독의
전통을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교회가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종속되지 않도록 만드는 건강한 장치로 본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공동체 한가운데서 들려주신다. 본문을 정성껏 읽고 문맥과 배경을 해설하며, 성도들이 함께 들은 말씀을 삶으로 옮기도록 돕는 과정에서 교회는 건강한 학습 공동체가 된다. 권면은 상처 위에 붙이는 임시 반창고가 아니다. 권면은 낙심의 논리를
하나님의 약속으로 반박하고, 죄책의 무게를 그리스도의 위로로 덜어내며,
선을 지속할 힘을 성령의 격려로 공급하는 동력 장치다. 가르침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지혜의
양육이다. 그는 교회를 “위대한 학교”에 비유한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영성 훈련과 문화 비평이 조화를 이루는 배움의 문화를 만들 때, 반지성주의의 유혹은 약해지고
지식의 교만도 누그러진다. 많이 알수록 더 겸손해지고, 깊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되는 배움이야말로 진리 수호와 경건 훈련을 잇는 다리다.
사역을 감당할 힘은 “네 속에 있는 은사”에서 나온다. 장재형 목사는 안수를 은사를 ‘주는’ 마술적 행위로 보지 않는다.
안수는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은사를 공동체가 식별하고 확인하며, 사역자 스스로에게 책임을
각인시키는 의식이다. 디모데후서가 말하듯 이 은사는 ‘불일
듯’ 다시 타오를 수 있다. 불은 한 번 붙었다고 저절로
지속되지 않는다. 기름을 보태야 하고, 그릇을 깨끗하게 지켜야
하며, 바람이 꺼트리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이때 멘토링과
동역의 문화가 중요하다. 선배는 후배를 질투하지 않고 세우며, 후배는
선배를 이상화하지 않고 배우는 공동체. 은사의 다양성은 경쟁의 이유가 아니라 감사의 이유가 된다. 교회는 소수의 스타 사역자에 의존하는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은사가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몸의 질서를 지향해야 한다.
결국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한 것은 “진보”였다. 어제와 같은 곳에 머무르지 말고, 오늘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요청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단어를
목회자의 학습 루틴, 영성 루틴, 리더십 루틴으로 구체화한다. 성경을 더 깊이 읽는 계획, 좋은 책을 꾸준히 소화하는 독서의 축, 동료 사역자들과의 정기적 토론과 피드백, 기도와 금식의 리듬, 휴식과 안식의 지혜를 포함하는 전인적 성장 지도는 화려하진 않지만 오래 간다.
진보는 외형의 확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교의 내용이 더 복음 중심으로, 상담의 언어가 더 공감적으로, 리더십의 결정이 더 공동체적으로, 재정 운영이 더 투명하게 변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변화가 공동체가
볼 수 있을 만큼 분명해지는 것, 그것이 진보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말은 삶을 포장하라는 지시가 아니라, 실재가
증거가 되게 하라는 요청이다.
디모데전서 4장의 마지막 권면은 목회자의 내면을 겨눈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지켜라. 이 꾸준함이 결국 자신과 듣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값싼 공로주의로 오해받을 수 있는 구절을 은혜의 리듬 안에서
해석한다. 구원은 은혜로 시작해 은혜로 완성된다. 다만 그
은혜가 역사하는 장(場)은 언제나 사람의 순종, 훈련, 공동체적 견인의 질서 안에 놓인다. 그러므로 ‘계속하라’는
요청은 성취를 쌓으라는 구호가 아니라 은혜의 리듬에 발을 맞추라는 초대다. 하나님은 성실하신 방식으로
일하신다. 우리의 작은 충성은 그분의 큰 은혜와 만날 때 생명을 낳는다.
오늘의 청년, 캠퍼스에서 신앙을 붙들려는 대학생, 직장에서 정직을 선택하려는 가장, 상처로 지친 교회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목회자에게 장재형 목사는 디모데전서 4장을 통해 구체적 적용을 건넨다. 진리 수호를 이념 전쟁으로 만들지 말고, 경건 훈련을 장식적 도덕으로
축소하지 말며, 권위를 힘으로 바꾸지 말고, 배움을 과시로
오염시키지 말고, 은사를 성취의 뱃지로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가 그것이다. 대신 그는 이렇게 제안한다. 말씀을 사랑으로 읽고, 예배를 기쁨으로 준비하며,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 경건을 훈련하고, 말의 절제와 행실의 품격, 사랑의 끈기와 믿음의 담대함, 정절의 투명함으로 본을 보이라는 제안이다. 이 본이 쌓일수록 리더의
말은 명령이 아니어도 무게를 얻고, 그의 권면은 설득이 아니어도 위로가 되며, 그의 가르침은 정보가 아니어도 생명이 된다. 이 길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이 길이 결국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복음을 선명하게 하고, 예배를 더 깊게 하고, 성도를 더 따뜻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한다.
장목사는 목회를 직업이 아니라 소명으로, 교회를 기관이 아니라 몸으로, 설교를 말 잘하는 재주가 아니라 말씀에 복종하는 훈련으로, 리더십을
권력 운영이 아니라 사랑의 책임으로 이해한다. 그의 독특함은 새롭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오래된 것을 다시 새롭게 만든다. 목회서신의 언어를
오늘의 거리로 끌어와 설명하고, 경건의 훈련을 일상의 루틴으로 번역하며, 권위와 권위주의를 또렷이 구분하고, 공적 성경 낭독과 권면과 가르침의
삼중 구조를 교회의 기본 설계로 추천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청년 지도자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이는 핑계가 될 수 없다. 경험의 빈틈은 순종의 충만으로 메울
수 있고, 권위주의를 거부하면서 권위를 세우는 길은 언제나 동일하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의 본을 보이는 것, 그리고 그 본이 쌓이도록 ‘계속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길의 끝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단순하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며, 이
일을 계속하는 자는 자신과 듣는 자를 살린다. 이 말이 참되며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하다는 바울의 선언은, 장재형 목사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목회의 원리로 다시 울린다. 교회의
진보가 보이기 시작하고, 공동체의 신뢰가 회복되며, 복음의
중심이 또렷해지는 자리에서 우리는 고백하게 된다. 우리의 소망은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의 힘은 전략이 아니라 은혜, 우리의 기쁨은 숫자가 아니라 순종이라는
고백이다. 그 고백이 목회자와 성도의 발걸음을 같은 리듬으로 묶어 줄 때, 디모데전서 4장은 과거의 교과서가 아니라 오늘의 체크리스트가 되고, 장재형 목사는 우리 손에 실용적 나침반을 쥐여 주는 안내자가 된다. 그리고
이 나침반은 복잡한 지도를 몰라도 길을 잃지 않게 만든다. 진리를 사랑하라. 경건을 훈련하라. 읽고 권하고 가르쳐라. 은사를 불일 듯 지펴라.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지켜라. 그 길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성실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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