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농부, 공부, 상인, 의사, 훈장이라는 다섯 명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 다섯 명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우선 농부는 농사를 지어 곡식을 생산하지만 곡식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 옷도 있어야 하고 집도 있어야 하고, 아프면 병원도 가야하고, 자식이 자라면 학교도 보내야 한다. 공부, 상인, 의사, 훈장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자기가 생산하지 않는 것을 모두 남으로부터 도움(조달)받아야 한다.
이렇게 하늘이 정해놓은 인간의 원천적 삶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것이다. 직업이 다양한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상부상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이다. 쌀을 사기 위해 김해평야를 갈 것인가, 김제평야를 갈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지만 쌀을 사야한다는 문제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바꿀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필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의(內衣)나 외의(外衣) 같은 의복과 조리용 칼과 냄비, 농사용 호미와 낫을 살 때도, 아플 때 가는 병원과 약국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옷가게, 공구 가게, 병원, 약국, 학교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선택해야 한다는 그 자체는 선택할 수 없다. 그런 생필품을 갖추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삶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選擇肢)가 있는 경우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선택지만 있는 경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먹어야 산다”는 자체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오직 하나뿐인 선택이지만, 빵을 먹을 것인가, 밥을 먹을 것인가는 얼마든지 내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선택을 필연적 선택이라고 하고, 선택의 여지가 있는 다양한 선택을 임의적 선택이라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필연적 선택과 임의적 선택을 반복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이 모여 행불행을 만들게 된다. 한 마디로 “인생은 각종 인연을 만들어가면서 웃고 우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현장이다” 이런 인연은 크게 볼 때 선연(善緣)과 악연(惡緣)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런 인연들은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어느 학교에 가서 어떤 선후배를 만나 인연을 맺을지는 전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어떤 직장으로 가서 어떤 상사를 만나 어떤 인연을 맺을지도 전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우연적 인연이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1880년, 미국의 어느 대학을 다니던 가난한 고학생이 자전거로 방문 판매를 하며 학비를 벌고 있었다. 그 날따라 유난히 물건이 팔리지 않아 주머니에는 겨우 동전 한 닢뿐이어서 음료수조차 사 먹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어느 시골집의 문을 두드렸더니 5~6살 되어 보이는 꼬마 여자아이가 나왔다. 차마 밥 한술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어 물 한 컵만 달라고 했다. 그 꼬마 아이는 지치고 배고파 보이는 고학생에게 물 대신 큰 잔에다 따끈한 우유를 가득 담아 건 네 주었다.
고학생은 물이 아닌 우유를 마신 후 그냥 돌아설 수 없어 “얼마를 드릴까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꼬마 여자아이는 손을 저으며 “어머니는 늘 저에게 좋은 일을 하거든, 절대로 대가를 바라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면서 거절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 날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후 그 고학생은 훌륭한 의사가 되었다. 어느 날 그 의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의사 선생님, 젊디젊은 위암 환자가 있습니다. 제발 좀 도와주세요.” 그 의사는 바로 환자를 데리고 와 수술을 한 후 살려내었다.
드디어 퇴원하는 날이 왔다. 환자는 자신의 병이 치료된 기쁨보다 병원비 걱정이 앞섰다. 가난한 그녀가 평생을 벌어도 갚을 수 없는 병원비가 나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원애서 내민 청구서를 보고 그녀는 너무도 놀랐다. “당신의 치료비는 십수 년 전 우유 한 컵으로 모두 지불 되었습니다.” 그녀의 위암 수술을 맡았던 의사는 꼬마여자 아이로부터 우유 한 잔을 얻어마셨던 존스홉킨스병원의 창립자, 하워드 켈리(Howard Atwood Kelly) 박사였고, 그 환자는 그날의 꼬마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SNS에 널리 퍼져 있는 실화라고 한다.
가난했던 고학생이 시골의 꼬마 여자아이를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또 그 여자아이가 십수 년이 지나 위암에 걸린 것도, 존스홉킨스 병원에 전화를 한 것도 역시 우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십수 년 전의 우유 한 컵으로 모두 지불되었습니다.”는 영수증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선인선과(善因善果)라는 필연이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연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필연(必然)은 선인(善因)을 심은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선인(善因)을 심은 곳에는 선과(善果)가 열릴 것이고, 악인(惡因)을 심은 곳에는 악과(惡果)가 열릴 것이다. 이것이 하늘이 정해놓은 불변적 천법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 이 불변적 천법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
-손 영일 컬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