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은 왜 잊고 사는가?’ - 이청준의 동화가 던지는 질문
밥그릇에 담긴 기억, 선생님의 절반이 주는 전부
“선생님은 여전히 밥그릇의 절반만 드셨다.”
이청준의 동화집 『선생님의 밥그릇』 속 한 장면은 그 어떤 거창한 말보다 강력한 침묵의 메시지를 남긴다. 밥그릇의 절반.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절식(節食)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존엄이다. 하지만 이 소박한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삶 전체를 붙드는 기억이 된다.
가난했던 시절, 도시락 하나 없는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기 위해 밥그릇 절반을 비운 선생님. 그는 말보다 먼저 행동했다. 제자들은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자리에서도 그 반쯤 비운 밥그릇을 통해, 잊고 있던 감정의 수맥을 다시 발견한다. 부끄러움, 고마움, 존경. 그것들은 모두 밥그릇 절반에서 피어올랐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식사 습관을 가졌는가? 포만에 익숙해지고, 포기나 나눔보다는 소유에 집착하는 시대. 이청준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에 담담히 그 시대를 묻는다. 밥은 누구와 먹는가? 밥그릇은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 어쩌면 이 동화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기억의 정치’에 대한 통렬한 고백이다.
동화는 아이의 것이 아니라, 어른의 거울이다
동화는 아이들의 장르라고만 생각하는 건 어른들의 오해일지 모른다. 『선생님의 밥그릇』에 수록된 이청준의 다섯 편의 동화는, 아동용 그림책의 틀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별을 기르는 아이>에서 순희는 병든 엄마를 위해 의사 선생님의 창문을 닦는다.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도록. 소녀는 별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어른의 논리로는 이 모든 것이 환상이고, 착각이며, 비현실이다. 하지만 이 동화를 읽는 어른의 심장은 이상하리만치 쿵 하고 내려앉는다. 잊고 살았던 감정, 맹목적인 믿음, 이유 없는 사랑, 그 모든 것이 한 소녀의 행동에 깃들어 있다.
어른은 현실을 산다. 그런데 아이는 마음을 산다. 동화는 바로 그 ‘마음의 시간’을 기록한 문학이다. 그래서 이청준의 동화는 사실상 어른들을 위한 감정 재활용소다. 우리는 그의 글에서 오래전 잃어버린 무언가를 문득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감정의 퇴적층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진심이다.
인정, 사랑, 기다림… 이청준이 빚은 ‘감정의 정원’
『그 가을의 내력』에 실린 두 편의 이야기 – <연>과 <빗새 이야기>는 가족 간의 애틋한 사랑과 기다림을 그려낸다. 진학하지 못한 아들이 연을 날리며 어머니에게 마음을 전하고, 연줄이 끊어진 날, 아이는 어머니 곁을 떠난다. 30년 만에 돌아온 그 아들에게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거치른 두 손’을 쓰다듬을 뿐이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진심이 남는다.
이청준은 사랑을 소리치지 않는다. 기다림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정을 증명해 낸다. 아이들은 성장하고, 어른은 변한다. 그러나 감정은 시간이 쌓일수록 깊이를 얻는다.
<나들이 하는 그림>에서는 화가 이중섭이 등장한다. 어린 아들의 죽음 앞에서 그는 그림으로 아이를 보낸다. 이중섭의 상상력과 이청준의 문학이 만나 하나의 환상동화로 승화된다. 환상은 때로 현실보다 더 실제적이다. 우리는 그런 환상 속에서 감정을 다시 배우게 된다.
다시 읽는 동화, 다시 찾는 마음 – 우리 사회의 감정 회복력
이청준은 머리말에서 “다시 읽어도 제법 보람이 남직한 글”을 추려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동화들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되, 어른의 가슴에 남는다.
아이들이 사라진 교실, 마음 없는 메시지, 감정이 휘발된 사회에서 우리는 다시 이 동화들을 읽어야 한다.
무관심에 익숙한 어른들이, 이청준의 동화 속 한 장면을 통해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선생님의 밥그릇, 소녀의 창문닦이, 연을 날리는 아이, 그림 속에 묻힌 아들. 모두가 누군가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작은 연대’의 기록이다.
이청준은 말한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어른은 왜 잊고 사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