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모없는 것은 없단다 —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강아지똥의 여행
더럽다고 외면당한 존재, 그 눈물의 가치
“아이, 더러워.”
《강아지똥》 속 주인공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이런 말로 외면당한다. 강아지가 아무 생각 없이 싸고 간 똥, 그것이 전부인 존재. 지나가는 참새도 병아리도, 심지어 농부마저도 그를 피해간다. 누구도 그 곁에 머물러주지 않고, 그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러나 강아지똥은 생각하고, 슬퍼하며, 자기 존재의 이유를 고민한다. "나는 왜 존재하지? 왜 모두가 나를 싫어하지?" 이 책은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그림책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게 되는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이 담겨 있다. 특히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이들,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느낀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는 뼈아프도록 절절한 공감이 인다.
《강아지똥》은 단지 눈물 많은 동화가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철학적이다. 존재의 쓸모를 인간의 시선이 아닌 ‘생명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아무도 쓸모없다고 여긴 똥이 한 송이 민들레꽃을 피워낸다. 감히 누가 그것을 더럽다고 할 수 있을까? 작고 미약한 존재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강아지똥이 민들레를 피우기까지 사랑이 만든 기적
봄비가 내려오던 날, 강아지똥은 어느 작은 민들레 싹을 만난다. 민들레는 말한다. “네가 없으면 나는 꽃을 피울 수 없어.” 그렇게 강아지똥은 감격한다. 이제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무가치해 보였던 자신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에 그는 기쁘게 민들레에게 스며든다. 뿌리로, 흙으로, 거름으로. 그렇게 한 송이 노란 민들레꽃이 피어난다.
이 장면은 동화 전체의 클라이맥스다.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에서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강아지똥은 자신의 고통과 눈물을 민들레에게 기꺼이 내어주며 진정한 의미의 희생과 사랑을 실현한다. 작가 권정생은 이 장면을 통해 ‘쓸모’라는 개념을 단지 경제적 가치나 사회적 유용성으로 좁히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과 생명, 사랑이라는 본질적 가치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다.
정승각 화가의 따뜻한 삽화는 이 이야기에 감정을 더한다. 의인화된 강아지똥의 표정 하나, 봄비를 맞는 민들레 싹의 여린 선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듯하다. 그림을 보며 어른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민들레 뿌리 같은 존재였을까?’
아이를 위한 동화, 어른을 위한 성찰
《강아지똥》은 아이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동화를 진짜로 읽어야 할 사람은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는 어른들이다. 경쟁과 효율의 시대에 ‘무가치함’이라는 낙인은 너무나 쉽게 찍힌다. 스펙이 낮다고, 돈을 못 번다고,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존재는 쉽게 외면받는다. 강아지똥처럼.
이 책은 그런 세태에 대한 조용한 반론이다. 당신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어딘가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처럼, 진짜 문제는 그 존재의 가치를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동화 속 강아지똥은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 나간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다. 이건 자기비하가 아니라 자발적인 자기완성이다. 우리는 언제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쓸모를 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당신은, 나도,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강아지똥》은 말한다. 쓸모없는 것은 없단다. 버려진 것들 안에도 생명이 있고, 의미가 있고, 가능성이 있다. 그 말을 곱씹다 보면,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나의 존재는 누군가에게 민들레꽃을 피우게 할 수 있다."
사회는 여전히 빠르게 돌아간다. 성과와 숫자만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다. 그 안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이들에게 《강아지똥》은 따뜻한 위로이자 희망의 메세지다.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가 민들레를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