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통증을 글로 눌러 담다: 감정 글쓰기와 정신건강의 연결
마음의 무게를 쓰기 시작할 때, 회복은 시작된다
누군가 말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쓰는 순간, 마음은 조금 가벼워진다"고. 처음에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슬플 때는 더 슬펐고, 불안할 때는 펜을 쥐기도 싫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 메모장에 조용히 내 마음을 적어본 적이 있다. "오늘은 너무 조용해서 더 외로웠다." 단 한 줄. 그런데 그 한 줄을 적는 순간, 정말로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다. 감정을 멋지게 문장으로 옮길 재주도 없다. 하지만 글은 나에게 묻지 않는다. 제대로 썼는지, 맞춤법이 틀렸는지, 왜 지금 이걸 쓰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나조차도 몰랐던 감정들이 종종 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화가 난 줄 알았는데, 그 밑엔 실망이 있었고, 실망 아래엔 외로움이 숨어 있었다.
글쓰기는 말하지 못한 마음의 무게를 꺼내는 도구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감정도, 글로 쓰면 내 마음 안에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바로 그 인정에서부터, 회복이 시작된다.
감정을 글로 적는 행위는 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감정을 쓰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건, 단지 기분 탓이 아니었다. 뇌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UCLA의 매튜 리버먼(Matthew Lieberman)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감정 명명(affect labeling)' 과정에서 뇌 속 편도체의 반응이 줄고, 우측 전전두엽의 활동이 증가한다고 한다.
쉽게 말해, 감정을 언어로 붙잡는 그 순간, 우리는 감정을 '조절 가능한 정보'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감정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지만, 그것에 휘둘리기보다는 '바라보는 위치'에 설 수 있게 된다. 이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감정을 떠올리는 것과는 다른, 언어화만의 고유한 신경학적 효과다.
나는 내 감정을 글로 써보며 이런 경험을 자주 한다. 어떤 날은 "오늘은 속이 뭔가 답답하다"고 쓰고, 다음 문장에 "사실은 인정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라고 적는다. 그러면 마음속에서 뒤엉켜 있던 감정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인식'함으로써 자유로워지는지도 모른다.
정신과 의사들이 주목한 '글쓰기 치료법'
실제로 정신건강 전문가들 역시 글쓰기의 힘을 오래전부터 주목해왔다. '감정 표현 글쓰기(Expressive Writing)'라는 기법은 미국 텍사스 대학의 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James Pennebaker)가 198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연구한 방식이다. 그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3-4일 연속으로, 하루 15-20분 동안 자신의 깊은 감정과 생각을 자유롭게 써보게 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단기간의 글쓰기만으로도 참가자들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감소하고, 면역 기능이 향상되며, 병원 방문 횟수까지 줄어드는 변화가 나타났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효과가 글쓰기 종료 후 몇 달간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국내 정신건강의학과에서도 '감정 일기'를 활용한 치료를 점점 확대하는 추세다. 특히 우울이나 불안을 겪는 이들에게 감정 표현 글쓰기는 초기 개입 단계로 권장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오히려 글을 잘 쓰려고 하면 감정을 포장하게 되고, 진정한 치유 효과가 사라질 수 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더 솔직할 수 있었다. 내 글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기록이었으니까. 그 글 안에서 나는 울기도 하고, 화도 내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치료였다고 느낀다.

일상의 기록이 마음을 지키는 습관이 되려면
글쓰기를 습관처럼 이어가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나도 여전히 매일은 못 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정기적인 쓰기'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쓰기'라고 믿는다. 감정이 벅차서 흘러넘칠 것 같을 때,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꺼내고 싶을 때, 그럴 때 글이 곁에 있으면 된다.
나는 메모장, 다이어리, 노션, 심지어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방'에도 쓴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아도 좋고, 단어 몇 개만 적어도 괜찮다. "두렵다." "지쳤다." "누가 좀 알아줬으면." 그런 문장이 모이면, 마음의 퍼즐이 맞춰진다.
연구에 따르면 지속적인 감정 글쓰기 습관을 가진 사람일수록 감정 조절 능력이 뛰어나고, 자기 이해도가 높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유를 가진다. 글을 쓰면서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글쓰기에는 '정답'이 없다. 매일 쓸 필요도, 긴 글을 쓸 필요도 없다. 다만 내 마음이 말을 걸어올 때, 그 목소리를 글로 받아적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갈 수 있다.
마무리하며: 감정을 글로 '이해한다'는 것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확신이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글을 쓰고 나면 마음속 풍경이 조금은 또렷해진다. 감정은 쓰기 전까지는 흐릿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적을 때마다 윤곽을 드러낸다.
감정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 그 길 위에서, 글은 가장 다정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페니베이커 교수는 말했다. "글쓰기는 우리가 경험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라고. 내 작은 경험도 그 연구의 일부가 된 것 같아 뿌듯하다. 오늘도 누군가는 빈 페이지 앞에서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 용기 있는 한 줄이,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