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감정의 착취
“이 일 좋아해서 하시는 거잖아요?”
이 말은 한때 한 아르바이트 청년이 상사에게 들은 말이다. 자발성과 열정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노동을 감내하도록 유도하는 이 멘트는, 그 자체로 구조적인 착취의 언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꿈을 좇으며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이라 믿지만, 어느 순간 그 꿈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소진되는 연료가 되어버린다.
열정은 원래 개인이 가진 강렬한 의지와 감정이다. 하지만 이 열정이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면, 더 이상 개인의 선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미디어, 문화 산업, 스타트업, 패션, NGO 같은 분야에서는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감정이 노동 조건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야근이 일상이 된 직장, 알바비도 받지 못하는 인턴십, 무보수 공연을 강요하는 예술계의 관행까지, 감정은 착취의 은밀한 도구로 변했다.
자기 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열정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거절은 곧 기회 상실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청춘은 자기 자신조차 포기한다. 사랑하는 일을 하며 고통받는 아이러니한 현실,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브랜드 뒤에 숨은 무임노동의 서사
이력서를 채우기 위해, 유명 브랜드 이름 한 줄을 얻기 위해 청년들은 무료 봉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스타트업에선 원래 다 그래”, “현장 경험이 중요하니까”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무임노동은, 단지 경험을 쌓기 위한 단계가 아니라 착취가 시스템화된 사회의 단면이다.
대형 페스티벌이나 패션위크, 게임 쇼와 같은 대형 행사에서는 스태프들이 ‘자원봉사’라는 이름으로 수백 명 동원된다. 대가 없는 노동에도 불만을 제기하면 “열정이 부족하다”, “사람이 많은데 굳이 너여야 할 이유 없다”는 말이 날아든다. 노동의 가치보다 ‘브랜드의 간판’을 쫓는 시스템 속에서, 청춘은 경력을 위한 미끼로 스스로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준다.
문제는 이런 착취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채용에서조차 ‘무급 인턴십’ 경력을 필수로 여기는 현실은 구조적인 모순이다. 비정상적 관행이 표준이 되어버린 지금, 열정은 가장 손쉬운 통화이며, 가장 값싼 비용이다. 우리는 이름값이라는 명목으로, 청춘의 시간을 헐값에 사들이는 시장에 살아가고 있다.
청춘의 노동을 ‘경험’이라 포장하는 사회
이력서에는 직함이 쌓여가지만, 통장 잔고는 비어간다. 말뿐인 ‘경험’이라는 단어는 실제 생계를 담보할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청년은 "이게 다 나중에 도움이 될 거야"라는 기대 속에, 혹은 그 기대조차 사치인 채로 노동에 뛰어든다.
사회는 "청춘은 고생하는 거야", "젊을 땐 배워야지"라는 말을 반복하며 열악한 환경을 정당화한다. 그 말들은 언뜻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상 열정이라는 감정을 이용해 책임은 회피하고 비용은 떠넘기는 교묘한 수사일 뿐이다. 청년은 사회적 투자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교체 가능한 유닛처럼 다뤄진다.
무급 인턴, 낮은 시급, 자비로 떠나는 워크숍, 개인 장비를 이용한 업무 수행. 이런 현실을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통로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청년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경험을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일에 대한 애정은 점점 고갈되고, 남는 건 ‘남들보다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뿐이다.
열정을 명분 삼아 책임을 회피하는 구조
결국 열정은 기업과 조직이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편리한 명분이다. 적절한 보상과 조건을 마련하는 대신, "이 일은 네가 원해서 한 거잖아"라는 말로 모든 문제를 개인의 선택으로 전가한다. 팀워크를 강조하며 개인의 헌신을 요구하지만, 정작 그 헌신이 깨졌을 때 조직은 책임지지 않는다.
이 구조의 본질은 불평등한 권력 관계다. 말단에게는 자발성을 요구하면서, 상부는 성과만 챙긴다. 열정을 내세워 성과를 끌어올리고, 그에 대한 보상은 정규직에게만 돌아간다. 이른바 ‘열정 착취 시스템’은 청춘의 에너지 위에 이윤을 쌓는 기형적 구조다.
이 시스템은 점점 더 정교해진다. 각종 공모전, 자원봉사, 창작 플랫폼 등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도록 유도하면서도, 정당한 대가 없이 이를 활용한다. ‘좋은 기회’, ‘포트폴리오용’이라는 말은 결국 조직이 아무 비용 없이 노동력을 사용하는 허가증일 뿐이다.

열정을 돌려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열정은 원래 찬란하고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열정이 착취의 수단으로 바뀌었을 때, 우리는 사회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열정은 보상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열정은 ‘희생’을 위한 명분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왜 열정은 언제나 청년만의 몫인가?’
‘왜 조직은 청년의 열정 앞에 정당한 임금과 시간을 제공하지 않는가?’
‘왜 자발성과 헌신은 항상 보상 없이 요구되는가?’
열정은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타오르게 해야 할 것이지, 누군가의 횃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열정이라는 말에 속지 말자. 스스로를 존중하는 선택이, 진짜 열정의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