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여름, EBS ‘부모’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책 읽지 않는 아이’라는 부제 아래 열 살 된 저희 둘째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글자를 읽으면 두통을 호소하는 아이의 하소연에 엄살이라 여겨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악보를 읽지 않으려고 외워서 친다는 피아노 선생님의 말씀에 사연을 보냈더니 당첨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며칠 동안 아이큐 검사, 심리 상담에서 학습 놀이까지 다양한 경험을 했고 PD 한 분이 집으로 방문하여 저와 아이의 생활을 촬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솔루션이 뭐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이는 정상이다’ 이런 말에 안도했던 것 같고, 이것저것 알려주신 학습 방법은 몇 번 해보지 않은 채 아이는 자라 버렸지요. 하지만 방송이 끝나고 패널로 함께 한 심리학 교수가 저에게 던진 한 마디는 지금까지 두고두고 기억에 남습니다. ‘집에서 찍은 촬영분을 보니 엄마 말투에 항상 짜증이 묻어 있네요. 엄마부터 상담 받아 보세요.’
중국에 갈 예정이라 상담은 받지 못했지만, 내 말투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을까? 아니면 결혼 후 직장 생활과 육아에 치이고 남편과 시댁, 친정 부모님에 대한 스트레스까지 겹쳐서 짜증스러운 말투로 변한 걸까?,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알몸을 들킨 듯 낯 뜨거웠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엔 정신적, 정서적으로 누구한테도 의지하지 못한 채 혼자서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습니다. 중국으로 이사하면 환기되어 달라지리라 기대했지만 워킹맘이라는 정체성까지 흔들려 저의 마음은 너덜너덜해져 버렸지요. 돌아와서 함께성장인문학 연구원의 ‘치유와 코칭 백일쓰기’를 소개받은 건 제 인생 일대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차마 말하지 못하고 꼭꼭 눌러 담기만 했던 아프고 부끄러운 이야기를 동기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씩 꺼내어 쓰고 보니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도 새롭게 보였습니다. 나와 동일시되어 볼 수 없었던 국면들이 드러나고 객관화라는 2차 반응을 일으키며 내면은 소란스러워졌지만, 백일쓰기가 끝나갈 때, 내 안에 작은 옹달샘 하나가 생긴 듯했습니다. 옹달샘의 맑은 물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었지요. 그렇게 뿌리 깊은 짜증을 씻어 내며 저는 그 샘이 마르지 않도록 백일쓰기 이후에도 읽고 쓰기 과정을 이어갔습니다.
만약 내가 ‘백일쓰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화를 내지 않으니 스스로를 평화로운 사람이라 자위하면서, 나를 찾아온 불행은 모두 내 탓이 아니니 나는 무죄라고 연민하면서, 이해하기보다는 합리화를 변명으로 삼으며 말끝마다 짜증 한 스푼을 얹은 후 소통하고 있다 믿으며 아슬아슬 위태롭게 버티고 있겠지요. 톨스토이는 몰이해와 잔인함은 서로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잔인한 셈이지요. 자신에 대한 몰이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관찰 대상으로 삼는 글쓰기만큼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나를 아는 첫걸음, 쓰기의 힘으로 내디딜 수 있습니다.
K People Focus 차경숙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정예서함께성장인문학연구원 수석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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