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무너지는 돌봄의 현장: 더는 가족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
“엄마, 나는 왜 혼자였어요?” 어느날 저녁, 일곱 살 아이가 물었을 때 엄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오지 못했던 그날, 가족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 단지 늦은 퇴근이었지만, 그 공백이 아이에게 남긴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우리는 돌봄이 ‘개인의 몫’으로 당연시되던 시대를 지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를 키우는 것도, 노인을 돌보는 것도, 아픈 가족을 간호하는 것도 가족의 의무로 남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더 이상 가족만으로 돌봄을 감당할 수 없는 구조다. 맞벌이 가구가 절반을 넘고, 핵가족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24시간 케어’는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돌봄을 담당하는 이들이 여성일 경우, 육아와 직장, 자기 삶 사이에서 늘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방치되고, 치매노인들은 고립되고, 중증 환자들은 제때 돌봄을 받지 못한다. 이처럼 ‘돌봄의 실패’는 개별 가정에서 시작되지만, 그 책임은 개인의 몫, 특히 여성에게만 전가된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돌봄이 실패하고 있는가? 무엇이 무너지고 있는가?
2. 국가의 부재, 시장의 침투: 돌봄이 돈이 되는 사회
돌봄은 인간적인 행위였지만, 이젠 서비스가 됐다. 베이비시터, 요양보호사, 방문간호사, 학습도우미, 심지어 ‘돌봄 매니저’라는 명칭까지 생겼다. 돌봄은 점점 상품화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돌봄의 질은 높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불평등만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돌봄 서비스는 돈이 있어야 이용할 수 있고, 좋은 서비스를 받기 위해선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이로 인해 소득 격차는 곧 돌봄의 질적 격차로 이어진다.
한편, 국가는 이 돌봄 문제에 있어 구조적으로 부재하거나,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예산을 쏟아붓는 듯 보이지만, 실질적인 인력 확충이나 시스템 개선에는 소홀하다. 돌봄 노동은 저임금, 고강도 노동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의 이직률은 높다. 그 결과, 돌봄을 받는 이들은 안정적인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돌봄 복지’가 아니라 ‘돌봄 산업’이 되면서, 돌봄은 더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효율성만을 따지게 되었다.
3. 사라지는 이웃, 단절된 공동체: 비공식 돌봄의 붕괴
한때 우리는 ‘이웃’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엄마가 바쁠 땐 옆집 아주머니가 아이를 봐주고, 병원 갈 일이 생기면 옆집 아저씨가 차를 태워줬다. 정식 계약서도 없고, 돈도 오가지 않았지만 이들은 중요한 ‘비공식 돌봄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아파트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층간소음으로 고소를 하고, 공동체보다는 사생활이 더 중요해졌다. 이웃이 사라졌고, 마을은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돌봄의 그물망도 사라지고 있다.
물론, 학교와 종교, 시민단체 등이 이 역할을 대체하기도 했지만, 점점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 학교는 성적 중심, 종교는 신자 수 중심, 시민단체는 프로젝트 중심으로 운영되며 돌봄이라는 느리고 꾸준한 활동에는 집중하기 힘들다. 결국 모든 부담은 다시 가족, 아니 어쩌면 개인(특히, 여성)에게 집중된다. 이렇게 단절된 사회는 위기의 순간마다 돌봄의 사각지대를 양산한다. 코로나19 때 자가격리된 노인들이 겪은 극심한 고립과 아사 사례가 그 단적인 예다. 이쯤 되면 돌봄의 붕괴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가 아닐까?
4. 새로운 돌봄의 상상: 공동체 기반 돌봄의 회복 가능성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구호는 타당하지만, 실행 가능한 시스템이 없다면 공허하고, ‘이웃이 필요하다’는 말도 실현 가능한 구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낭만에 불과하다. 결국 필요한 건 ‘공동체 기반 돌봄’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이 개념은 복지국가와 시민참여가 결합된 형태로, 마을 단위에서 공동으로 돌봄 책임을 나누는 시스템이다. 핀란드나 네덜란드는 이미 이런 실험을 해왔다. 마을 요양센터, 공공 보육협동조합, 자원봉사 기반 방문 돌봄 등이 그 예다.
한국에서도 가능성은 있다. ‘마을 돌봄센터’, ‘돌봄 품앗이 플랫폼’, ‘공공돌봄 클러스터’ 등의 시도가 일부 지자체에서 이뤄지고 있다. 특히 서울 성북구의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모델은 공무원과 주민이 함께 고립된 이웃을 찾아 돌보는 방식으로 주목받았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이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법적 제도, 예산 확보, 시민의식 개선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돌봄을 단지 복지의 문제가 아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기본권’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결론: 돌봄의 위기, 사회가 응답할 때다
돌봄은 이제 개인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돌봄의 책임을 재정의하고, 그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돌봄은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당신이 언젠가 돌봄을 받아야 할 입장이 되었을 때, 지금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그대로 돌아올 것이다.
사회가 돌봄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 대가는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