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정리는 로마서 12장 9-21절 말씀을 중심으로, 교회 안의 성도들이 지녀야 할 ‘열두 가지 생활 규범(롬
12:9-13)’과 교회 밖의 사람들을 대할 때 유념해야 할 ‘열두 개의 윤리 규범(롬 12:14-21)’을 두 개의 소주제로만 정리한 것이다. 특히 이 본문의 가르침을 오늘날 교회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교회 공동체의 성숙과 대사회적 책임’의 관점에서
재해석해본다.
Ⅰ. [교회 안] 열두 가지 생활
규범 (로마서 12장
9-13절)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의
초반부(1-8절)에서 은사와 헌신에 대해 말한 뒤, 9-13절을 통해 그리스도인 공동체(교회 안) 안에서 지켜야 할 열두 가지 생활 규범을 제시한다. 이 열두 가지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으로서, 교회 구성원 간의 관계를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고 건강하게 가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곧 교회 공동체가 아름다운 ‘형제애의 공동체’로 세워지기 위한 구체적 원리들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사랑을 토대로 하여, 거짓 없는 선과 우애, 존중, 부지런함, 열심, 그리고 소망과 기도로 충만해야 한다”고 요약하면서, “이 열두 가지 규범이 실제로 교회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그
공동체는 비로소 세상에 줄 수 있는 ‘빛과 소금’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먼저 본문 말씀을 살펴보자.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9-13)
바울이 말하는 이 열두 가지는 문자 그대로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막상 실제 생활 속에서 온전히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교회가
이 덕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각 신자가 자신의 삶 속에서 이를 실천해 갈 때, 그 교회는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공동체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곳인 만큼, 무엇보다도 성도 개개인의 마음에 이 열두 가지 기준이 깊이 박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가 함께 성장하고, 세상 속에서 신앙의 진정한 증거를 나타내는 비결”이라고 강조한다.
-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바울이 제시하는 첫 번째 규범은 ‘거짓 없는 사랑’이다. 오늘날 수많은 매체와 대중문화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범람한다. 유행가의 가사,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수도 없이 언급되지만, 그 사랑이 정말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인지 돌아보면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이익을 위해 누구를 이용하거나, 혹은 겉으로만 달콤한 말로 ‘사랑’을 표방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사랑, 곧
아가페(agape) 사랑은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온전히 ‘주는 사랑’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고전 13:4-5)는 그 유명한 구절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언뜻 보기에 그럴듯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 사랑에 뿌리를 두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거짓과 이기심이 판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거짓 없는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악을 미워해야 한다. 세상의 풍조에 물든 죄악, 부도덕, 온갖 악행들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말라’고 사도는 경고한다. 사실 신자가 교회 안에서 먼저 죄와 싸우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실상 우리도 ‘조금쯤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눈앞의 유혹과 타협하려 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악이 우리 삶에 슬그머니 들어와 자리를 잡아버린다.
장재형목사는 “악 자체를 미워한다는
것은, 죄를 짓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정죄하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도
죄인을 정죄하지 않으셨고, 대신 죄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즉, ‘죄를 짓는 사람을 도리어 불쌍히 여기되, 죄 자체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라며, “여기서 ‘선에 속하라’는
말씀은 단지 좋은 일을 하거나 착하게 살라는 일차원적인 뜻을 넘어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선의 편’에 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헌신하라는
의미”라고 풀이한다.
-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사랑이란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내는 세 번째 규범은 ‘서로 우애하기’이다. 바울은 교회 안에 함께 있는 지체들을 가족처럼, 아니 가족 그 이상으로 서로 귀히 여기라고 권면한다. 세상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못되게 군다면, 우리도 그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기 쉽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비록 상대가 잘못을 하더라도 여전히 형제로서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
12:48)라는 물음을 통해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맺어지는 가족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셨다. 교회 공동체에서 우애는 단순한 의무감이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진
한 몸 된 지체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오늘날처럼 개개인이 고립되고 소외되기 쉬운 시대에는, 교회
안에서의 ‘형제적 우애’가야말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목말라하는
치유의 통로가 된다”고 역설한다.
-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바울은 이어서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명한다. “빌립보서 2장 3절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한다. 이 말씀은 단순히 말을 예쁘게 하라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경의(敬意)를 표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설명한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 비하나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남을 나보다 더 높여 주고 섬기는 적극적 행위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연스레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스스로 그들을 섬기게 된다. 이는 곧 교회 내에서 서로를 귀히 여기며, 한 지체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동력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초대교회 당시 사도행전 2장의 공동체는 서로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하며,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했다. 겸손의 마음으로, ‘혹시 내가 다른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진 않을까?’를 끊임없이 살피는 태도가 결국 성령 충만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든다”고
말했다.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다섯 번째로 바울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라고 가르친다. 기독교 윤리에서 흔히 금욕주의나 지나친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인해 현실적 노동을 경시하는 오해도 있지만, 성경은 결코 게으름을 긍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마 25장)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받는 장면은 매우 강렬하다.
잠언 곳곳에서도 “조금 더
자자, 조금 더 졸자…네 빈궁이 강도같이 이른다”(잠 6:10-11; 24:33)고 경고한다. 바울 자신도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까지
직설적으로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주님께서 맡기신
귀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게으른 종이 아니라, 그 달란트를 활용하여 열매 맺도록 힘써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가 봐도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자들이
있는 반면, 늘 뒤로 빠져 있거나, 다른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부지런히 각자 맡은 바 사역과 봉사, 또 일상의 책임을 다함으로, 교회 안에 활력이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열심을 품고.”
게으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은 바로 ‘열심(열정)’이다. 일상어로 ‘열심’은 그저 부지런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이 말하는 열심은 내면의 뜨거움을 가리킨다. 계시록 3장 15-16절에서 주님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네가 미지근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겠다”고 단호히 경고하셨다. 이처럼 ‘열심’과 ‘온도’는 밀접하게 연결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불로 인하여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본 떨기나무는 작고 초라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타오르는 불이 있었다. 또 예수님 자신도 외양적으로 아름답고 풍채가 있는 분은 아니셨으나(사 53:2), 성전을 정화하실 때 보였던 격렬한 열정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열심을 품는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복음 사명에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움직이라는 뜻이다.
- “주를 섬기라.”
열심을 가지되, 그 방향은 ‘주를 섬기는 것’으로 향해야 한다. 어떤 사본에서는 로마서 12장 11절의 “주(큐리오스, kurios)를 섬기라”가 “때(카이로스, kairos)를 섬기라”로 잘못 표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재형목사는 “두 단어가 모두 헬라어에서 자음 축약이 비슷하여 생긴 필사상의 혼동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사실 큐리오스와 카이로스가 주는 메시지는 통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을 향해 ‘주(하나님)를 섬기라’고 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이 정하신 때(카이로스)를 붙들라’는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신자는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고, 그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세월을 아끼라(엡 5:16)”는 말씀처럼,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늘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주를 섬기는 삶은 그저
교회에서 예배 잘 드리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와 사명을 붙들고, 그분의 주권 안에 순종함으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그리스도인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소망하기에 기쁨을 잃지 않는다(롬 5:2, 8:24). 바울은 로마서 5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으며, 8장 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역설했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롬 8:29-30)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다. 따라서 신자는 결코 삶이 뒤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나아간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다. 그래서 소망 중에 즐거워할 수 있다. 이 깊은 신앙적 비전이 분명하면, 교회 안에서도 더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봉사와 교제를 펼칠 수 있다”고 말한다.
- “환난 중에 참으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자세는 곧 환난 중에도 인내를 낳는다. 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꽃길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한층 성숙해진다. 교회 안에서도 어려움이나 시련이 찾아올 수 있다. 때로는 관계 안에서 갈등이 있기도 하고, 재정적인 문제나 개인적 실패를 겪는 지체들도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리스도인은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으며, 하나님께서 선하게 역사하실
것임을 믿으라’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욥이 환난 후에
정금같이 나오게 되었듯(욥 23:10), 인내는 그 자체가
우리를 연단하고 영적으로 한 단계 올려놓는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역사에서 크게 쓰임 받았던 인물들을 보면 대개 환난 중에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독보적인 인격적·영적 성장을
이룬 경우가 많다. 그 인내의 모습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며, 그것이
바로 사랑과 소망 안에서 힘을 얻은 증거”라고 말한다.
- “기도에 항상 힘쓰며.”
열 번째 규범은 ‘기도’를 쉬지 말라는 것이다(살전 5:17).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필연적으로 기도가 따라온다. 기도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행위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각종
시험과 유혹, 갈등과 고난이 상존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바울이 ‘항상 기도하라’고 강조할 만큼,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이며, 끊어지면 생명력도 잃는다”고 했다.
교회 공동체가 무엇보다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의 새 힘을 공급받고, 교제와 사역이 더욱 능력 있게 펼쳐진다.
-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열한 번째 규범은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고 구체적으로 돕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실질적으로 재산을 나누고, 가난한 자를 돕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았다(행 2장, 4장 참조). 갈라디아서 6장 10절에서는 “믿음의 가정(교회)에 선을 행하기를 우선하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생활의 구체적 모습이다.
누군가가 실직이나 사고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혹은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을 때, 바로 달려가 도와주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보여줄 수 있는 참된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라 하신 말씀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환원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많은
교회가 대형화·제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개개인 성도의
삶에 세밀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성도 개개인이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생활화한다면, 어느 누구도 소외되거나 버려지지 않는, 진정한 형제애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강조한다.
-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마지막 열두 번째 규범은 ‘손(나그네) 대접하기’이다. 유대인 전통에는 낯선 이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환대(hospitality)가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아브라함 역시 나그네들을 대접하다가 오히려 하나님과 천사를 접대하게 되는 복을 받았다(창 18장). 히브리서 13장 2절도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다”며, 낯선 이에게 베푸는 친절의 가치를 강조한다.
당시 로마나 헬라 지역은 여관이 음란과 방탕이 넘치는 퇴폐적 환경일 때가
많아, 안전하고 깨끗한 숙박이 어려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손님을 환대하고 돌보는 전통이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이런 환대와 대접은 물질적 도움을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는 구체적 방법이 된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면, 먼저 문턱을 낮추고 낯선 이들을 따뜻이 맞이할 줄 알아야 한다.
결국 로마서 12장 9-13절의 이 열두 가지 규범은 교회 안에서 서로를 대할 때 가져야 할 핵심적이고도 실천적인 덕목들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열두 가지가 살아 숨 쉬는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한 순수한 사랑, 악에 대한 강력한 경계심, 서로
존중하고 함께 성장하는 풍토가 조성된다. 또한 기도와 인내 가운데 끊임없이 영적 성장을 이루면서, 결국 그 열매가 사회로도 흘러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지켜야 할 열두 가지 규범을 잘 마음에 새기고, 함께 이를 실천해 나갈 때, 교회 공동체는 인간적인 우정이나 이해관계를
초월한,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교회 안에서의 참된 신앙공동체의 삶’이며, 장재형목사가 오늘날 특별히 강조하는 교회 성도의 ‘기본 생활수칙’이기도 하다.
Ⅱ. [교회 밖] 열두 개의 윤리
규범 (로마서 12장
14-21절)
이어서 바울은 14절부터 21절까지, 교회 안의 성도가 교회 밖의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규범(9-13절)과 달리, 여기서는 ‘대사회적
윤리’,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 혹은 교회를 적대하거나 박해하는 자들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열두 가지 가르침이 제시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두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실천적 복음의 모델이 되려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심지어 적대자를 어떻게 마주하느냐가 핵심”이라며, 로마 제국의 박해와 헬라 철학적 대립이 첨예하던 초대교회 상황 속에서도 이 말씀이 생생히 적용되었음을 강조한다.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4-21)
이제 바울이 제시한 교회 밖 윤리의 열두 가지를 각각 살펴보자.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초대교회는 늘 주변의 핍박과
오해 속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폭력이나 증오로 맞서기보다, 주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혁명적 계명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이 점이 로마 제국을 놀라게 했고, 결국
기독교가 온 제국으로 퍼져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덧붙인다.
-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가장 첫 번째이자 가장 어려운 가르침이다. 세상 관점에서 누군가가 나를 박해하고 해치면, 당연히 ‘저주하거나 복수하는 것’이 정상적 반응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마 5:43-48)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고,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는 길’이라고 선언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할 수 없던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셨다(롬
5:10). 우리 스스로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길이다. 바울은 자기를 박해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을 떠올리며,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듯이, 박해자 역시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라 설명한다.
-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두 번째 윤리는 ‘공감’이다. 마태복음 11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며 당대의 무정함, 마음이 닫힌 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하셨다. 바울은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도 우리가 그들의 상황에 함께 공감하길 원한다. 누군가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픔이 있을 때 함께 울어 주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 구절을 교회 외적인 관계에 적용하면,
믿지 않는 이웃, 직장 동료, 가족 중에 누군가
좋은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슬픈 일을 당하면 진심으로 위로해 줄 때, 그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감정이 메마른 게 아니구나. 그들도 정말 따뜻하구나’를 체감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작은 공감의 손길을 통해서 복음의 문이 열릴
수도 있다. 대단한 전도 프로그램이나 설교가 아니라,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가 복음의 통로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역설한다.
-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바울은 이어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고 권면한다. 물론 여기서 ‘같이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동조 압력’과는 다르다. 진정한 화합과 일치(unity)는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에서 비롯된다. 교회가 세상과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즐거워하는 것은 악이 아닌 이상, 긍정적인 부분에서 함께 기뻐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이 슬퍼할 때 함께 애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군자는
화(和)하되, 동(同)하지 않는다는 고사성어처럼, 교회와
세상이 아예 담을 쌓고 불통하는 것은 결코 복음적이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죄악에 휩쓸려서 함께
죄를 짓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결국 ‘마음을 같이한다’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사랑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곧 세상 속에서 교회가 가져야 할 중요한 접근법”이라고 해석한다.
-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이 가르침은 ‘겸손’에 대한 강조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종종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우리는 의롭고, 너희는 죄인’이라는 식의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교만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막 10:45)이라고 하셨다.
“진정한 겸손은 낮은 자의 처지로 내려오는 것이다. ‘아, 저 사람도 내 형편을 잘 알아주네, 함께 낮은 곳에 서 주는구나’라는 감동을 세상 사람들이 받을 때, ‘믿는 사람들은 뭔가 달라’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즉,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교만할 수 없다”고 말한다.
-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스스로 지혜를 자랑하거나, ‘내가 더 잘 안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역시 교만의 한 형태다. 자문(잠 26:4-5)에 “미련한 자에게 대답하지 말라”라는 말과 “미련한 자에게 대답하라”라는 말이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대처해야 함을 보여준다.
“진짜 지혜는 자기 과시가 아니라, 사랑과 공감에서 나온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와 실제 삶의 행적으로 지혜가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인의
대사회적 태도 역시,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랑하기보다, ‘어떻게
이들을 사랑으로 이끌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이어지는 규범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논리는 ‘정당방위’와 ‘맞대응’이지만, 복음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라고 요구한다. 예수님께서 “보복(eye for eye)을 넘어서,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 대라”고 하신 극단적 표현은, 결국 악을 선으로 끊으라는 메시지다.
“초대교회가 늘상 박해와 오해를 받으면서도, 폭력 시위나 테러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인들을 위해 기도하며, 선한 행실로 보여
주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 내에서 점점 더 많은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악에 대해 똑같이 악으로
맞서면, 결국 더 큰 악이 뒤따를 뿐이다. 교회가 이 길을
따라가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사람들이 혹 교회를 적대시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선을 나타낼 것인지’를 궁리하라는 가르침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세상에서 존경받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끝까지 선한 일을 추구하겠다는 굳은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단지 자선사업이나 도덕적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와 가치,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드러내는 모든 일이 포함된다. 모욕을 받더라도 인격적으로 대응하고, 억울한 오해를 당하더라도 진실을 지키며, 궁극적으로 사랑을 고수하는
것이 바로 ‘선한 일의 도모’다.
-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바울은 ‘할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모든 사람이 우리 선행에 무조건 호응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대한 ‘화목’을 지향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팔복 중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마 5:9)이라 하신 것처럼, 교회의 본질적인 정체성에는 ‘화해자(mediator)’ 역할이 포함된다.
“교회가 내부적으로 싸우고 분열만 일삼는다면, 어떻게 세상에서 화해와
평화를 말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교회가 먼저 성도들 간에 화해와 용서를 실천하고, 밖으로는 다른 사람들과도 가능한 한 평화롭게 지내려 애쓰는 모습을 보일 때,
그 자체가 강력한 복음의 증언이 된다”고 말한다.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가르침이다. 바울은 신명기 32장 35절 말씀(“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을 인용하며, 우리가 직접 복수하려 하거나 원한을 품고 되갚으려 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나중에 하나님이
벌하실 테니 나는 신경 안 써도 된다’는 식의 태만이나, 복수심의
위탁이 아니다. 오히려 절대적인 공의의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니, 우리
편협한 시각으로 사람을 심판하려 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불의를 방관하라는
말이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되 심판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라는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이 말씀은 잠언 25장 21-22절을 인용한 것으로, ‘네가 원수에게 오히려 선을 베푸는 것은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것’이라는 표현이 매우 강렬하다. 숯불이 머리에 쌓인다는 것은 곧 ‘원수가 스스로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회개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욱 확실하게 임하게 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결국 선을 베풀어도 상대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건 상대의 책임이다. 그러나 교회는 적대자에 대하여 최후까지 사랑과
선을 실천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 기회를 최대치로 제공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원수 사랑의 윤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상론’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용서해 주심으로 이미
본을 보이신 아주 실제적인 진리”라고 말한다.
- “악에게 지지 말고.”
바울은 이 모든 권면을 요약하면서 ‘악에게 지지 말라’고 명한다. 악에 굴복하여 악에 물들거나, 악의 방식으로 맞대응하는 것은 이미 거기에 진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심하게 비난하거나, 개인적으로 나를 모함한다고 해서, 똑같이 분노하고 폭력적인 대응을 한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패배하는 셈이다.
장재형목사는 “악을 이기려면
일단 지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 지지 않는 방식이 세상식의 힘의 대결이 아니라, 끝까지 선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길이다. 종려주일에 환호하던 군중이 금세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변덕을 부렸을 때도, 예수님은 결코 악에 굴복하거나
맞서 악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그 길 끝에서 오히려 부활과 승리가 있었다”고 설파한다.
- “선으로 악을 이기라.”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대사회적 윤리’의 핵심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은 단지 윤리적 선행이나 규범적 착함을 의미하기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와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악에 대항하기 위해 더 큰 악을 끌어들이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폭력은 새로운 폭력을 낳고, 증오는 더 극심한 증오를 낳는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들은, 십자가에서
이미 선이 악을 이긴 사건을 바라보며, 그 발자취를 따를 수 있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패배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의 악을 가장 철저하게 무너뜨린
승리의 현장이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메시지는 바로 이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이다.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하고, 폭력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는 ‘선의 증인’으로 서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궁극적 결론”이라고 풀이한다.
로마서 12장 14-21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교회 밖을 향한 열두 가지 윤리 규범은 교회 안의 윤리(9-13절)를 넘어, 더욱
폭넓고 또 심오한 차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적대자와 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응하여, 결국에는 악의 고리를 끊으라’는 사도의 간절한 당부가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매우 중시한다.
그는 “성도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면, 결국
우리가 이 본문을 실천하는 데 달려 있다.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폭력에 맞서 폭력으로, 미움에 맞서 미움으로 대응하는 그 순간, 교회는 이미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기꺼이 주님의 방법으로 ‘원수를
축복하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실천에 도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롬 12:2)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참모습이다.
로마서 12장 전체, 특히 9-13절과 14-21절에
걸쳐 드러난 바울의 가르침은 하나로 이어진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 형제처럼 우애하고 봉사하며 섬김으로써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밖으로는 심지어 박해하는 자들도 축복하고,
원수들에게까지 선을 베풀며, 악을 이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 두 큰 축이 균형을 이룰 때, 교회는
내부적으로 사랑과 성숙을 이루면서 외부적으로도 강력한 복음의 증거를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교회 안과 교회 밖의 경계에 서 있는 우리는, 안으로는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며, 밖으로는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바울의
열두 가지 규범과 열두 가지 윤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매뉴얼이자,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완성될 수 있는 고귀한 표준”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교회가 바울이 제시한 생활 규범과 윤리 규범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면서도, 세상 가운데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마 5:13-16)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구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환경, 그리고 신앙 외적인 가치관의 충돌 속에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나 현대 한국 교회나, 성경이 주는 원리는 동일하다. 사랑, 겸손, 봉사, 인내, 축복, 그리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태도가 없으면, 교회는 그 존립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결론적으로 “결국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보여 주는 ‘교회 안의 열두 덕목’과 ‘교회 밖에서의 열두 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반에 대한 종합 교본이다. 교회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교회 밖에서는 원수를 향해서도 축복을 베풀며, 폭력과 증오를 부정하고
선으로 맞설 수 있는가?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주는 최고 메시지이자,
교회가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났음을 입증하는 열매다. 모든 성도가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실제의 삶에서 몸소 실천하길 바란다”고 강력히 호소한다.
우리 각자가 이 가르침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날마다 실천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는가가 관건이다. 바울이 말한
교훈과, 장재형목사가 그토록 강조해 온 “두 영역(교회 안과 밖)에서의 신실한 복음 실천”이야말로, ‘예배자로서 드리는 몸의 산 제사(롬 12:1)’가 실제 삶에서 꽃피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 길이 쉽지는 않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는 충분히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에서 교회 공동체는 점점 더 성숙해지고, 세상에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이처럼 로마서 12장 9-21절에서 제시된 교회 안과 밖을 향한 두 가지 거대 문맥의 가르침은, 단순히
과거 초대교회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오늘날 현대 교회가 꼭 붙들어야 할 ‘생활 규범’과 ‘윤리
규범’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곧 ‘거짓 없는 사랑’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정신’이
자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