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러섬의 기술
— 하륜을 읽다
청암 배성근
하늘은 사람을 쓰되
앞에 나서게 하지 않는다
도토리 키 재기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자기 자리를 지킨 이의 발자국이다
정몽주는 칼에게 등을 보였고
그의 충절은 선죽교 난간에 핏물처럼 말라갔다
정도전은 별처럼 떨어졌고
그의 사상은 차가운 조복의 소매에 스몄다
두 사람은 바람 같았지만
끝내 창을 막지는 못했다
하륜은 말보다 무거운 침묵을 택했다
임금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면
자신은 낮게, 더 낮게
벽지 같은 자세로 물러섰다
그는 권력을 탑이라 보지 않았다
그는 권력을 거울처럼 닦았다
태종이 칼을 세울 때마다
하륜은 칼집을 덧대었다
어떤 밤은 지붕 아래 참새가 되어
임금의 불면을 대신 울기도 했다
군주는 외롭고 신하는 많다
말은 있었지만 칼이 되지 않았고
뜻은 있었지만 국정이 되지 않았다
그는 충이 아니라 온도를 지켰다
권력 곁의 미풍처럼
정치는 전쟁보다
더 많은 시체를 만들 수 있지만
그는 살아남아 조회의 불빛 아래
매일 죽는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어떤 충성은 고기를 끊게 하고
어떤 충성은 목을 베게 하지만
어떤 충성은 조용히 70의 언덕에 앉아
자신의 꽃잎을 다 쓰고 지는 것
올 여름, 나는 하륜을 읽는다
불꽃이 아닌, 재가 된 슬기를
칼이 아닌, 칼집의 지혜를
말이 아닌, 입술 안쪽의 망설임을
그 망설임이 어떻게 한
시대를 통과했는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