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조카를 바라보던 엄마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당신 생의 첫 손주가 사랑스러운 할머니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아직은 결혼 전, 나 또한 똘망똘망하고 귀여움 한도 초과인 조카에게 흠뻑 빠져 있었고 말이다. 세상 재밌는 예능을 본방 사수라도 하듯, 한 아이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어른들이 아이의 한 동작 한 동작을 놓칠세라 좇는데. 엄마가 꿀이 뚝뚝 흐르는 눈빛으로 조카에게 묻는 거다. "우리 OO이 어쩜 이렇게 똑똑하냐~ 나중에 크면 1등할 거야?"
"응!" 그 당찬 대답에 오빠(아이의 아빠)와 엄마(할머니)의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번졌다. 행복 보증 수표라도 받아든 듯 승천하던 광대들. 그때, '잠깐! 이거…맞아?' 싶은 자각은 어쩌자고 고개를 쳐들었을까? 순식간에 난 그 장면 밖으로 밀려났고, 뭣 모르는 작은 아이와 기대에 들썩이는 두 어른의 어깨만이 무대를 꽉 채우는 게 보였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날 엄마의 표정과 비슷한 얼굴을 이제는 내 시어머니에게서 봐오는 중이다.
"우리 OO이는 뭐든 깨치기만 하면 무섭게 잘할 거야~ 의사라고 못할까 봐?!" 요즘 연필 좀 들고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한 우리 아이를 바라보던 어머님(아이의 할머니)이 뱉으신 말씀이다. 당신 생의 첫 손주가 귀하디 귀한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을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에도 했으면 좋았을 그 말을,
"아이는 아주 평범해요"
자기 자식을 평범하다고 말하는 부모라니… 애정이 모자라 보이는가? 그럴 리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가 세상 누구보다 특별한 건 모든 부모에게 매한가지일 거다. 다만, 아이의 특별함은 그저 존재 자체로 소중하기 때문이지, 그가 지닌 능력이나 그가 이루는 성취와 무관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아이들은 스스로 반짝이는 존재다. 애쓰지 않아도 빛나는 별처럼 말이다. 종종 그런 아이들의 '그저 소중함'을, '소중하니까 넌 누구보다 특별해야 해'라는 믿음으로 곡해하는 부모 세대의 모습을 보게 될 때가 많다. 1등은 해야지, 명문대는 나와야지, 의사는 돼야지… 물론 그 전제에 "넌 누구보다 소중하니까"라는 부모의 깊은 사랑이 내재되어 있다는 걸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아이에게 자신의 특별함을 부모가 원하는 방식으로 증명해내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빛나는 별이 왜 자신의 빛을 염려해야 하는가? 어차피 다들 눈부신 '별이 빛나는 밤'에, 그들 중 평범한 별 하나가 되어도 존재 본연의 빛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을 텐데 말이다.
평범하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 [네이버 어학사전]
모든 존재와 그 삶은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색다르지' 않더라도 존중받고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평범하다는 걸 '저평가됨'으로 받아들이고, 남들보다 특별하지 않으면 도태될 거라는 불안에 휩싸여 스스로를 혹사하는 무한 경쟁의 트랙 위에서 내려 서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세태가 부모 세대의 언행에도 암암리에 스며들어 자녀 세대를 똑같은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분명한 건, 그 급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또한 부모만이 할 수 있다는 거다. 나도 아이가 한 가지를 잘하면 나머지 열 가지는 더 잘하기를 바라고 아이의 특별해 보이는 조그만 한 낌새에도 부푼 기대의 만리장성을 쌓는 그런 부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와 함께 한 동화책을 읽게 되었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간 '평범함과 특별함'에 대해 지녔던 고착화된 생각들을 산산이 조각내버리는 걸 느꼈다.
여기 그 동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건, 아주아주 평범한 게코 도마뱀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느 열대 우림 속 '하워드' 라는 게코 도마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아주아주 평범하다는 걸 하워드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특별한 아니 그 열대 우림에서 유일하게 몸 색깔을 바꾸는 존재라고 믿었던 하워드는 뽐내듯 말하곤 했다. "나처럼 특별하게 사는 건 쉽지 않아." 그가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개구리, 나비, 대벌레, 뱀, 새, 원숭이 등. 무수한 위장동물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하워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무엇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를 열대 우림 최고의 변신 대왕이라고 불러줘." 줄기차게 뻐기는 하워드를 지켜보고 있던 대벌레 한 마리가 결국, 하워드를 향해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그제야 자기도취에서 빠져나온 하워드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아주 작지만 분명히 나뭇가지 색깔로 위장한 그 대벌레를 발견했다. 뛰는 듯 놀란 하워드, 그는 대벌레를 통해 처음으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열대 우림에 사는 위장동물은 자신 말고도 얼마든지 많다는 걸 말이다.
"내가 열대 우림에서 가장 뛰어난 변신 동물이 아니라는 거야?" 실망한 하워드는 대벌레에게 물었다. 대벌레는 그가 아주 평범한 게코 도마뱀이라고 거듭 설명해주었다. 순간 하워드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더니 평범한 건 싫다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왜 싫냐고 의아한 듯 묻는 대벌레를 보며 하워드는 더욱 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말했다.
“내가 평범한 게코 도마뱀이면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야말로 하워드의 왜곡된 신념이었다. 자신이 특별하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을 거란, 불안. 그래서 남들 앞에서 늘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고, 자기중심적인 삶 속에서 어엿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했다. 언제나 제대로 보아야 할 걸 죄다 놓쳤고 말이다. 그가 보아야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위장은 특별함이 아니라 열대 우림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보편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 위장동물은 위장 때문에 특별해지는 게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모두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널 좋아해"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워드가 돌아본 곳에는 그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동물이 서 있었다. 대벌레는 그녀를 '또 다른 평범한 게코 도마뱀'이라고 소개했다. 하워드는 보랏빛에 반짝이는 피부를 가진 돌로레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너는 평범하지 않아… 너무나 아름다운 걸!" 그러나 대벌레는 천연덕스럽게 맞받아쳤다. "아니, 쟤도 평범해."
그제야 하워드는 깨달았다.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 저마다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걸. 돌로레스는 꽤 오래 전부터 자신과는 다른 게코 도마뱀 하워드를 지켜봐 왔을지 모른다. 하워드가 자신에게만 도취되어 지내는 동안은 그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가 왜곡된 신념을 깨고 세상을 향한 제대로 된 시선을 던졌을 때, 둘은 비로소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야 자기 안에 갇힌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을 보게 된 하워드. 그에게도 진정한 사랑이 찾아왔다. 이제는 돌로레스와 함께,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서로의 몸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는 행복을 깨달은 하워드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지 않은가? 서로가 가진 고귀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 상대가 지닌 존재 자체로서의 소중함을 그저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너는 평범해
이 책을 모든 부모가 그 아이들과 읽어보기를 권하는 마음이다. 내 아이가 특별해야 누구보다 행복할 거라고 믿고 있는 부모들에게. 그러느라 자신의 생에서 겪었던 불안을 자식에게도 대물리고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며 생의 진정한 행복을 다시금 어루만져 보면 좋겠다. 또한 사랑 받기 위해서는 특별해져야 한다고 믿게 되어버린 아이들에게. 특별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넌 아주아주 평범한 그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걸, 온 사랑을 담아 전하고 싶다.
K People Focus 김지원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 2025년 현재, 5세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쓰는 엄마입니다. 국문학과 국어 교육을 전공했습니다.
케이피플 포커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 시 표기 의무
■ 제보
▷ 전화 : 02-732-3717
▷ 이메일 : ueber35@naver.com
▷ 뉴스홈페이지 : https://www.kpeoplefocu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