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 100년 은행나무가 불러낸 ‘사물의 의회’

서울환경연합·예술인팀 ‘나무의 의회’, 시민참여 워크숍 3회 마무리

뿌리·토양·CCTV·주민 등 20개 ‘행위소’ 통해 사건의 관계망 추적

조사·번역·동맹으로 이어진 시민 실험…2027년 참여형 다원예술로 확장

▲《관계를 소환하라! : 도시 나무를 둘러싼 행위자들》 3회차 워크숍을 마친 시민 참여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서울환경연합

“도시의 나무 한 그루는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100년 넘은 은행나무에서 시작된 질문이 나무와 인간, 토양과 제도, 주민과 전문가 사이의 보이지 않던 연결을 찾아가는 시민 실험으로 확장됐다.


서울환경연합과 예술인팀 ‘나무의 의회’가 공동 기획한 이번 워크숍은 도시 나무를 홀로 존재하는 개체가 아닌, 수많은 인간과 비인간이 얽힌 ‘관계적 존재’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과학기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에서 착안해 사건에 연결된 여러 행위소를 시민이 직접 조사하고 해석하도록 구성했다.

 

 

워크숍의 출발점은 지난 4월 부암동 환기미술관 인근에서 발생한 은행나무 제초제 주입 사건이었다.
 

서울환경연합 측은 지난 4월 22일 환기미술관과 계약한 조경업체가 미술관 담장 옆 사유지 도로에 있는 100년 이상 된 은행나무에 제초제를 주입했다고 전했다. 이후 5월 중순 나뭇잎이 누렇게 변하고 떨어지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주민의 제보로 사건이 알려졌으며, 인근 거주민이 제공한 CCTV를 통해 관련 사실이 확인되자 환기미술관 직원이 “약품을 주입했다”고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사건을 둘러싼 질문은 ‘누가 나무에 약품을 주입했는가’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나무 한 그루의 생존에 어떤 사람과 사물, 자연환경과 제도가 연결돼 있는지를 찾아보자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문제의식이었다.

 

 

첫 번째 과정은 사건이 발생한 공간을 직접 관찰하는 현장조사였다.
 

9월 12일 열린 1회차 ‘나무를 둘러싼 연결망 현장조사’에서 참가자들은 부암동 은행나무 주변을 직접 살펴보며 사건에 영향을 미친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 및 조건을 찾아 기록했고, 부암동 은행나무 ‘수화(樹話)’ 살리미 구성원인 현경 유니온신학대학원 명예교수와 최진우 서울환경연합 생태도시전문위원이 현장 안내에 참여했다.

 

현장조사와 추가 자료조사를 거쳐 뿌리, 토양, 제초제, CCTV, 조경업자, 종로구청, 지역주민 등을 포함한 20개의 핵심 ‘행위소(actant)’가 추려졌다. ‘행위소’는 관계망 속에서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치거나 상황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 또는 조건을 의미한다.

 

 

두 번째 과정에서는 이들 행위소의 위치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번역’이 시작됐다.
 

9월 14일 낙원상가 엔피오피아홀에서 진행된 2회차 ‘행위자 소환과 번역하기’에서 참가자들은 20개 행위소 가운데 하나를 무작위로 맡았으며, 이후 자신에게 배정된 행위소의 입장에서 은행나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추론했다.

 

‘수액과 도관’을 맡은 한 참가자는 이를 “제초제를 나뭇가지에 전달해 은행나무를 죽인 통로이자, 살리기 위해 발버둥 치며 물을 실어 나른 기관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지역주민’을 맡은 참가자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범위를 차지하지만 실질적인 결정권이 없기 때문에, 은행나무와 가깝지만 가깝지 못한 관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크숍은 참가자의 상상만으로 비인간의 입장을 대신 말하는 방식에 머물지 않았다. 첫 번째 ‘번역’을 마친 참가자들은 자신이 맡은 행위소의 특성과 역할, 은행나무와의 관계를 뒷받침할 근거를 개별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처음 내린 판단을 자료와 증거를 통해 다시 검토하도록 했다.

 

워크숍을 총괄한 시각예술가 정윤선 작가는 “비인간을 소환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목소리가 대변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비인간을 대신해 말할 때 번역의 근거와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충분한 조사와 학습, 서로 다른 지식과 증거를 검토하며 자신의 판단을 수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과정의 핵심은 조사한 관계를 참가자의 몸과 공간을 이용해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9월 21일 열린 3회차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은 바닥에 펼쳐진 ‘나침반’ 위에 섰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자신이 맡은 행위소와 은행나무의 관계가 얼마나 직접적인지를 판단해 중심과의 거리를 정하고, ‘생명·관계·증거·권한’이라는 네 방향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선택했다.

 

다른 행위소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자신의 판단을 다시 검토했다. 새로운 정보가 기존 판단을 바꿀 만하다고 생각하면 위치와 방향도 조정하는 등 사건을 처음부터 정해진 관점으로 바라보는 대신 조사와 대화를 거쳐 판단을 수정하는 과정을 공간 위에 표현했다.

 

 

워크숍은 기존 관계를 확인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새로운 관계가 필요한가’를 묻는 단계로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문제 해결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행위소에게 ‘동맹’을 요청하고 서로를 리본으로 연결했다. ‘새’는 ‘지역주민’에게, ‘지역주민’은 ‘조경업자’에게, ‘조경업자’는 ‘나무 전문가’에게 각각 동맹을 제안했으며, 서로 다른 역할과 이해관계를 가진 행위소들이 필요한 상대를 호명하면서 기존 연결과는 다른 관계망이 만들어졌다.

 

특히 ‘나무 전문가’는 가장 많은 동맹 요청을 받은 행위소였다. 해당 역할을 맡은 참가자는 그 이유를 “사회적 책임의 상징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고 말했다. 나무의 치료와 관리에 필요한 전문성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돼 있고, 나무를 살리기 위한 판단의 근거와 그에 따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행위소의 요청이 집중된 것으로 해석했다.

 

이번 시도는 ‘사물의 의회’를 실제 사건에 적용하면서 조사와 판단 수정, 신체적 표현을 결합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워크숍을 참관한 김환석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참여자들의 몸과 움직임을 활용한 퍼포먼스 형식의 실험은 국내에서 처음이어서 매우 참신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인간 못지않게 중요한 비인간의 관계를 가시화하고 이를 통해 사건을 판단한다는 ‘사물의 의회’의 취지를 살리면서, 우리 현실에 맞는 독자적인 형식을 창안하고 실험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시 나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보호 대상’에서 ‘관계의 주체’로 확장됐다.
 

조해민 서울환경연합 활동가는 “이번 은행나무 독살 사건은 관계의 복잡성을 간과한 채 인간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며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이번 워크숍의 제목처럼 더 많은 관계를 소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죽임의 관계망이 아닌 살림과 동맹의 관계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이번 워크숍이 그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워크숍은 2027년까지 이어지는 예술 프로젝트 《나무의 의회》의 과정으로 진행됐다. 올해 시민들과 탐색한 도시 나무 주변의 행위자와 관계를 향후 관객 참여형 다원예술로 발전시켜 2027년 선보일 예정이다.
 

기획진은 올해 시민 참여형 퍼포먼스를 통해 관계를 가시화하고 ‘잠정적 동맹’을 형성하는 단계까지 진행했다면, 앞으로는 번역과 숙의 절차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지속적인 협의와 제도적 실천으로 이어질 조건을 탐색한다는 계획이다.

 

워크숍에는 총 35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김영준·김현영·남소연·이경미·정윤선·정한나 등 도자·시각·미디어·연극·기후활동 분야 예술인 6명이 공동 기획과 진행을 맡았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주최하는 ‘2026 예술로 기획사업’의 하나로 마련됐으며 서울환경연합과 예술인팀 ‘나무의 의회’가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했다.

 

100년 넘은 은행나무에서 시작된 사건은 결국 ‘도시에서 인간과 나무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사건 주변의 사람과 제도뿐 아니라 토양과 수액, CCTV와 같은 비인간까지 관계망 안으로 불러들인 이번 실험은 하나의 답을 제시하기보다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연결을 찾아내고 판단을 다시 검토하는 과정에 무게를 뒀다.
 

2027년까지 이어질 《나무의 의회》가 이 ‘관계의 실험’을 어떤 예술적·사회적 방식으로 확장할지가 다음 과제로 남았다.

 

 

 

 

 

 

작성 2026.09.30 10:34 수정 2026.09.3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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