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인터뷰/연재]
청산되지 못한 역사, 대한민국 초기 기득권이 된 ‘전쟁범죄국 협력자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법적·이념적 뿌리를 독립운동에 두고 있다는 선언이다. 하지만 국가의 기틀을 다진 초기 인적 구성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일제강점기 침략 전쟁에 협력하고 식민 통치에 앞장섰던 부역자들이 해방 후 처벌받기는커녕 국가의 핵심 요직을 장악하며 주류 기득권으로 안착했기 때문이다.
사회 정의와 민족정기의 실종이라는 비판을 받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인적 실태를 부문별로 짚어본다.
■ 총칼을 쥔 군·경 수뇌부, ‘황군’과 ‘순사’ 출신의 귀환
국가의 물리력을 상징하는 군대와 경찰은 부일 협력자들이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분야였다.
대한민국 육군의 최고 수장인 육군참모총장 자리는 제1대부터 제10대까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일본군 및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 독점했다.
제1대 총장 이응준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일본군 대령까지 진급해 전쟁에 협력했던 인물이며, 6·25 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백선엽(제5·7대 총장) 역시 일제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며 항일 무장 세력 토벌에 참여한 이력이 명백하다.
치안을 담당한 경찰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해방 직후 수도경찰청 간부의 80% 이상이 조선총독부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다.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 등에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던 악질 고등경찰 노덕술이 대표적이다.
그는 해방 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라는 요직에 앉아 권력을 휘둘렀으며, 친일파 청산을 위해 출범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자신을 체포하려 하자 특위 요원들을 암살하려는 음모까지 꾸몄다.
■ 사법부와 행정부, 식민지 기술자들이 짠 국가의 틀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와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부 역시 총독부 출신 엘리트들의 독무대였다.
일제 법원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징역형과 사형을 선고했던 판·검사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사법부의 수뇌부가 되었다. 초기 사법부 핵심 인력 대부분이 이들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대구지방법원 판사 등으로 근무했던 조진만은 훗날 제3·4대 대법원장을 지내며 한국 사법권의 정점에 섰다.
행정부 역시 식민지 수탈 체제에 기여한 관료들이 장·차관과 도지사 직을 이어받았다.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전시 총동원 체제 하에서 농상무성 관리로 일했던 신현확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국가를 운영할 ‘전문 행정 인력’이 부족하다는 명분 아래, 전쟁 부역자들의 경력이 국가 기여로 둔갑한 셈이다.
■ 반민특위의 와해와 기득권의 세습
1948년 제헌국회는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법적 기구인 반민특위를 구성하고 부역자 처벌에 나섰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안보와 치안 공백, '반공(反共)'을 내세워 특위를 철저히 방해했다. 1949년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면서 특위는 실질적인 성과 없이 강제 와해되었다.
이로 인해 청산의 기회를 잃은 부역 세력은 반공주의를 무기로 독재 정권의 중심축이 되었고,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공고한 기득권 동맹을 형성했다. 나라를 팔아먹고 전쟁에 협력한 자들은 권력과 부를 누리고,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가난과 소외에 시달리는 ‘역사의 주객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해방되었으나, 인적 구성에서는 전범국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한 채 그들을 지배층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역사적 오점과 한계를 안고 출발하게 되었다.
이 미완의 청산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의 이념 갈등과 정의관 불신의 깊은 뿌리로 남아있다.
[ 약산소식지 권용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