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들의 일생 ③ 이혼|법과 현실 사이의 부부 관계

칠거지악과 삼불거로 본 조선의 혼인 질서

가문과 예법, 국가 관리 속에 놓인 부부 관계

오늘의 이혼제도와 다른 조선시대 부부 관계

오늘날 이혼은 혼인관계를 법적으로 끝내는 절차다. 부부가 협의해 이혼할 수도 있고, 합의가 되지 않으면 재판을 통해 관계를 정리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이혼은 부부 두 사람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가문과 예법, 여성의 지위, 국가의 관리가 함께 얽힌 일이었다.
 

조선시대 이혼 제도와 현대 이혼 절차의 차이를 법과 가족관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표현한 AI 생성 이미지

조선시대 이혼 제도와 현대 이혼 절차의 차이를 법과 가족관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표현한 AI 생성 이미지

오늘날 이혼은 혼인관계를 법적으로 끝내는 절차다. 부부가 협의해 이혼할 수도 있고, 합의가 되지 않으면 재판을 통해 이혼 여부와 위자료, 재산분할, 자녀 양육 문제를 정리한다. 현대의 이혼은 부부 당사자의 의사와 법적 권리, 자녀의 복리를 중심으로 다뤄진다. 법제처 생활법령정보도 협의이혼 때 미성년 자녀가 있으면 양육과 친권에 관한 협의서를 법원에 제출해야 하며, 위자료와 재산분할도 합의가 되지 않으면 법원이 정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이혼은 오늘날의 이혼과 성격이 달랐다. 그것은 부부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정리하는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가문과 예법, 여성의 지위, 제사와 자녀의 지위, 국가의 관리가 함께 얽힌 문제였다. 조선사회에서 혼인은 두 사람의 결합이면서 두 집안의 결합이었기 때문에, 혼인관계를 끊는 일도 개인의 감정만으로 처리되기 어려웠다.

 

조선시대에는 혼인관계를 해소하는 일을 여러 말로 표현했다. 조선시대 혼인 해소와 관련해 이이, 이혼이라는 말도 쓰였지만, 기별, 기처, 출처처럼 남편이 아내를 버리거나 내쫓는다는 뜻을 가진 용어가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사전도 이이를 조선시대 부부가 혼인 관계를 청산하고 갈라서는 행위로 풀이하면서, 출처·기별·기처·휴기 등을 관련 표현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용어는 조선의 이혼이 오늘날처럼 부부가 대등하게 관계를 정리하는 제도라기보다, 남편과 시가, 국가의 판단이 크게 작용한 제도였음을 보여 준다.

 

이혼 사유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칠거지악이다. 칠거지악은 남편 쪽에서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고 여긴 일곱 가지 사유를 말한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자식이 없는 것, 음행, 질투, 악질, 말이 많은 것, 도둑질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칠거지악이 아내를 남편 개인의 배우자로만 보지 않고 조상의 뒤를 이을 가문이 맞이한 존재로 이해한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칠거지악에 해당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혼이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삼불거라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불거는 아내가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시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른 경우, 가난할 때 혼인해 뒤에 집안이 부귀해진 경우에는 함부로 내보낼 수 없다는 원칙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선시대가 일반적으로 이혼을 제한했고,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더라도 삼불거에 해당하면 쉽게 이혼이 성립되지 않도록 했다고 설명한다.

 

이 점은 조선의 이혼 제도를 단순하게 볼 수 없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여성에게 불리한 구조가 분명히 있었다. 아내의 행실과 출산 여부, 시가와의 관계가 이혼 사유로 거론되었고, 혼인관계의 주도권은 남성 쪽에 더 크게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예법이 이혼을 쉽게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정처의 지위를 일정하게 보호하려 한 측면도 있었다. 조선에서 혼인은 개인의 사적 관계가 아니라 가문과 사회질서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특히 양반층의 공식적인 이혼은 국가의 관리 아래 있었다. 조선시대 양반이 공식적으로 이혼하려면 국가의 승인이 필요했다. 조선왕조실록사전도 조선에서 법제적인 이혼은 쉽지 않았고, 『대명률』에 준해 처리되었으며, 남편이 부인의 구타나 간음 등의 사유를 제기했을 때 제한적으로 이혼을 허용했다고 정리한다. 이는 이혼이 단순한 부부 사이의 감정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통제하는 가족질서의 문제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법과 현실은 늘 같지 않았다. 국가가 이혼을 엄격히 관리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사적으로 혼인관계를 끊는 일도 있었다. 서민층에서 저고리 깃을 잘라 상대에게 주어 이혼의 징표로 삼은 할급휴서의 관습이 있다. 이는 공식 법제와 별개로 생활 현장에서 혼인관계를 정리하려는 방식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조선의 이혼 문제에는 정치적 사건과 사회적 위기 또한 영향을 주었다. 배우자의 집안이 반역으로 몰렸을 때 혼인을 끊으려는 경우가 있었고, 이를 역가이혼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또 다른  자료에는 처의 집안이 반역죄를 범했을 때 남편이 자기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이혼하는 사례가 있었다고 소개한다. 이런 사례는 이혼이 부부 사이의 불화만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 정치적 책임, 신분 질서와도 연결되었음을 보여 준다.

 

전쟁과 사회적 혼란도 부부 관계에 영향을 주었다. 전쟁 중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과의 혼인관계, 남편이 첩을 두고 정처를 박대하는 문제, 사적으로 이별 문서를 주고받는 현실 등은 조선의 이혼이 법전의 원칙만으로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조선의 이혼은 법과 예법의 규범, 가문의 이해관계, 실제 생활의 갈등이 서로 부딪치는 지점에 있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변화는 뚜렷하다. 현재의 이혼은 부부 당사자의 의사와 법률상 권리관계를 중심으로 다뤄진다. 혼인관계를 계속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지, 자녀를 누가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 부부가 함께 형성한 재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법제처 생활법령정보는 혼인 중 부부가 공동으로 형성한 재산은 이혼 때 재산분할 대상이 될 수 있고, 자녀가 있는 경우 친권자와 양육자, 양육비 문제도 정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물론 오늘날에도 이혼은 개인과 가족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일이다. 자녀 양육, 경제적 문제, 가족관계의 변화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부부가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조선시대 이혼이 가문과 예법의 질서 속에서 관리되었다면, 오늘날 이혼은 개인의 권리와 자녀의 복리, 공정한 재산관계를 중심으로 정리된다.

 

조선시대 이혼을 살피는 일은 과거의 부부관계를 단순히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혼인이 한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고, 부부관계를 끝내는 일이 왜 그렇게 엄격하게 관리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조선의 이혼 제도에는 여성에게 불리한 구조와 함께, 혼인질서를 유지하려는 국가의 통제도 함께 존재했다. 그 복합적인 모습을 볼 때 조선의 가족제도와 생활문화를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사람들의 일생」 시리즈 3편은 이혼을 통해 조선의 부부 관계가 법과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살핀다. 혼인은 가족을 만드는 절차였지만, 그 관계를 끝내는 일 역시 가족과 가문, 국가가 함께 개입한 중요한 생활사였다.

 

작성 2026.06.11 17:40 수정 2026.06.1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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