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漢儒學] 집은 쉼터여야지, 신분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의 ‘식무구포 거무구안(食無求飽 居無求安)’을 다시 읽는다. 

 

음식을 먹을 때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거처할 때 편안함을 구하지 말라는 공 선생님의 말씀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다분히 금욕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문장을 곰곰이 씹어보면,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굶주림이나 불편을 강요하는 고문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이 인간성 그 자체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경계하라는 준엄한 경고에 가깝다.

 

오늘날 우리의 식탁을 보자. 배달 앱을 몇 번 누르면 치킨과 족발, 탕수육이 문 앞까지 당도한다. 굶주림이 문제가 아니라, 넘쳐나서 버려지는 음식이 문제인 시대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무심히 버려지는 반찬들을 보며 문득 기묘한 괴리감을 느낀다. 지구 반대편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먹지만, 우리는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린다.

 

공 선생님이 말씀하신 ‘식무구포(食無求飽)’의 현대적 본질은 여기에 있다. 배를 곯으라는 것이 아니라, 풍요 속에 가려진 탐욕과 낭비를 직시하라는 것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의 배만 채우는 도구인지, 아니면 생명에 대한 예의를 갖춘 행위인지를 묻고 있는 셈이다.

 

거처에 관한 문제로 넘어가면 상황은 더 서글퍼진다. 잠자리는 편안해야 한다. 고된 노동을 마친 이에게 휴식은 내일을 위한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안함’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리는 순간, 집은 본래의 기능을 잃고 변질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증명하는 ‘계급표’나 ‘신분증’처럼 쓰이고 있다. 어느 동네, 몇 평짜리 브랜드 아파트에 사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과 가치를 결정짓는 척도가 되어버린 천박한 현실이다. 주거의 안정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오로지 부동산 가치라는 숫자에 매몰되어 서로를 차가운 시선으로 재단한다. 특히 임대주택을 향한 뒤틀린 편견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보여주는 아픈 단면이다.

 

집은 안식과 회복의 공간인 ‘쉼터’여야지,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파트 평수는 일시적인 자산 상황일 뿐, 사람의 내면이나 타인에게 미치는 선한 영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넓은 평수에 살면서 속이 텅 빈 사람보다, 소박한 공간에서도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채워가는 이의 가치가 훨씬 크다.

 

불편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편안함과 화려함을 인생의 최종 목적지처럼 떠받들며 인간의 도리를 잊지 말자는 뜻이다. 배달 음식의 편리함 뒤에 숨은 낭비를 경계하고, 아파트 브랜드라는 껍데기보다 내면의 크기를 키우는 삶.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현대판 ‘식무구포 거무구안(食無求飽 居無求安)’이 아닐까.

 

결국 사람의 진짜 가치는 그가 머무는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생각과 행동의 깊이에서 결정되는 법이다.

작성 2026.05.15 05:41 수정 2026.06.0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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