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7장 설교를 통해 율법과 복음, 은혜와 회개, 믿음의 순종이 어떻게 참된 자유로 이어지는지 묵상합니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는 평생 한 문 앞에 서 있었으나 끝내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등장한다. 문은 그를 향해 열려 있는 듯 보였지만, 그는 그 문을 생명의 길로
통과하지 못했다. 이 짧고도 불안한 이야기는 로마서 7장을
읽는 마음에 오래 남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율법은 인간 앞에 세워진 거룩한 문과 같다. 그것은 죄를 감추지 못하게 하고, 마음 깊은 곳의 탐심과 자기 의를
드러내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실제를 비춘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살지 못한다. 죄인을 살리는 길은 율법의 선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복음의 은혜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는 로마서 7장 설교를 통해 바울이 율법을 폐기하려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짚는다. 바울은 율법을 가볍게 여긴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율법을 사랑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되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거룩한 거울이지만, 죄인을 의롭게 하는 능력은 복음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은 율법과 은혜를 서로 적대시키는
장이 아니라, 율법의 자리와 복음의 능력을 가장 선명하게 구별해 주는 깊은 성경 묵상의 자리다. 이 장의 울림은 오늘의 신앙에도 낯설지 않다. 사람은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의를 확인하는 도구로 삼거나, 반대로 은혜를 말하며 말씀의 요구를 가볍게 만들려 한다. 그러나 바울이 보여 주는 길은 둘 중 하나가 아니다. 그는 율법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율법 앞에서 드러난 죄인을 살리는 능력이 오직 그리스도께 있음을 증언한다. 이 균형을 잃지 않을 때, 성경 묵상은 도덕적 훈계에 갇히지 않고
복음의 중심으로 깊어질 수 있다.
거울 앞에서 드러나는 죄의 얼굴
율법은 인간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마음의 결을 비춘다. 탐심, 교만, 불순종, 자기 의는 사람의 눈에는 쉽게 포장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숨을 곳을 잃는다. 바울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고백한
것은 율법이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 선하고 필요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인간이다. 율법은 “하라”와 “하지 말라”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인간은 그 기준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발견한다. 말씀은 높고 선하지만, 죄의
권세 아래 있는 마음은 그 선한 명령을 생명으로 완성하지 못한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절망에 가두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복음의 필요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진다.
율법이 없다면 회개는 흐려진다. 죄가 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이 없다면 소망도 사라진다. 죄를
보았으나 그 죄에서 벗어날 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의
신학적 통찰은 바로 이 긴장 속에서 빛난다. 율법은 우리를 깨우고, 복음은
우리를 살린다. 거울은 얼굴의 더러움을 씻어 주지 못하지만, 더러움을
보게 한다. 그 깨달음이 은혜를 향한 첫걸음이 된다.
여기서 회개는 자기혐오가 아니다. 회개는 율법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정직하게 보는 것이며, 동시에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열려 있음을 믿는 것이다. 죄를 아는 것과 죄책감에 갇히는 것은 다르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지만, 은혜는 죄인에게 다시 일어설 소망을 준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은 절망의 장이 아니라, 절망을 통과해 복음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은혜의 통로다.
정죄의 문턱을 넘어 은혜의 자리로
로마서 7장의 혼인의 비유는 바울의 논증 가운데
매우 섬세한 장면이다. 한 여인이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여 있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비유를 통해 바울은 신자의 새로운 관계를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신자는 단지 규범을 바꾼 사람이 아니라,
존재의 소속이 바뀐 사람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명이 힘을 갖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율법의 정죄 아래
있던 옛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끝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죄의 값을 담당하셨기에, 율법은 더 이상 믿는 자를 사망의 판결 아래 묶어 둘 수 없다. 이것은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대속의 복음이 주는 실제적 자유다. 정죄의 언어가 마지막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가 마지막 말이 되었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결코 방종이 아니다.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는 허락이 아니라, 죄의 무게를 십자가 앞에서 더 깊이 알게 하는 능력이다. 값비싼 은혜를 아는 사람은 죄를 쉽게 말하지 않는다. 용서받은 사람은
죄를 변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과 순종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복음은 죄책감을 지우는 심리적 위안에 머물지 않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게 한다.
이때 자유는 외부의 규칙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새로운
주인을 만난 상태다. 옛사람이 죄와 정죄 아래 묶여 있었다면, 새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하여 하나님을 향해 열린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을 무책임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깊은 책임, 곧 사랑받은 자로서 사랑하고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며 은혜 받은 자로서 순종하는 삶으로 부른다.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맺는 열매
바울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목적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단지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삶의 방향이 바뀐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반드시 열매로 나타난다. 구원은 내면의 위로로
끝나지 않고, 관계와 말과 선택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흔적으로 드러난다.
이 열매는 억지로 만들어 내는 종교적 성과가 아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생명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듯, 믿음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사랑과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율법 아래에서는 두려움이 사람을 움직였지만, 복음
안에서는 은혜가 사람을 움직인다. 두려움은 사람을 잠시 붙잡을 수 있지만, 사랑은 사람을 깊이 변화시킨다.
겉으로는 두 삶이 비슷해 보일 수 있다. 둘 다
순종을 말하고, 거룩을 말하며, 선한 삶을 말한다. 그러나 뿌리는 전혀 다르다. 하나는 정죄를 피하려는 몸부림이고, 다른 하나는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참된 순종은 두려움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영혼이 맺는 기쁨의 열매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자신을 증명하려는 노동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을 삶으로 돌려드리는 감사의 움직임이다.
율법을 넘어, 율법의 뜻 안으로
복음은 율법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이
가리키던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은 차원에서 이루게 한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 하지만, 복음 안에서 주님은 미움의 뿌리까지 다루신다.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
하지만, 주님은 마음의 욕망까지 비추신다. 그러므로 복음의
삶은 율법보다 가벼운 삶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더 깊어진 삶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균형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율법주의는 사람을
정죄와 두려움 안에 가두고, 율법폐기론은 은혜를 값싼 말로 만들어 버린다. 바울은 이 두 극단을 모두 거절한다. 율법은 죄를 보게 하는 거룩한
기준이며, 복음은 그 죄에서 우리를 건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율법을 멸시하지 않고, 율법 앞에서 절망한 사람은 복음을 더욱 간절히 붙든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에게도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율법주의의
언어는 때로 매우 경건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과 비교, 자기
증명의 피로가 숨어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은혜를 말하면서도 회개와 순종을 잃어버리면 복음은 삶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편리한 변명이 되고 만다. 로마서 7장은
이 두 길 사이에서 우리를 다시 십자가 앞으로 데려간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은 오늘의 성경 묵상 속에서도
우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여전히 자기 의와 정죄의 잣대 아래 살고 있지는 않은가. 또는 은혜를 말하면서 죄에 둔감해진 것은 아닌가. 복음의 자유는
그 둘 사이의 느슨한 타협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다.
율법은 우리를 깨우고, 은혜는 우리를 일으킨다. 회개는 깊어지고, 믿음은 부드러워지며, 사랑은 실제가 된다. 그 자리에서 순종은 더 이상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응답이 된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7장 설교가 남기는 물음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정죄의 문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복음의 문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때 신앙은 법 앞에서 멈춘 불안한 기다림이 아니라, 은혜의 문 안으로 들어가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여정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