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추상미술에서 물감의 역할이 단순한 색채 전달 수단을 넘어 독립된 조형 언어로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 물감의 물리적 두께 자체를 시간의 기록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주목받고 있다. 의령남씨 조선 개국공신 의령부원군 25세손인 남인우 화가의 2023년 작 <19 삭사이만(削詞而慢)>이 대표적 사례다.
'삭사이만'은 '말을 줄이고 행동을 신중히 한다'는 뜻으로, 작가는 이 철학을 조형 방법론으로 직접 전환했다. 캔버스 위에 불필요한 형상의 묘사를 배제하고, 오직 물감의 물리적 덩어리와 색채의 배치만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작가 고유의 '버터크림 임파스토' 기법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점도 유성 물감을 크림나이프로 층층이 압착하고, 건조 후 다시 덧입히는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해 캔버스 표면에 일반 유화의 수십 배에 달하는 두께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재료 간 화학적 상호작용과 자연스러운 수축·팽창에 의해 표면 전반에 균열과 요철이 발생하며, 최소 6개월 이상의 물리적 건조와 중첩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구조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캔버스는 평면이 아닌 하나의 입체 구조물로 기능한다. 나이프가 지나간 자리에 형성된 물감의 융기는 외부 광원의 각도에 따라 스스로 그림자를 생성하며, 시각적 감상을 넘어 촉각적 존재감을 전달한다. 작가는 이를 '조각적 현존(Sculptural Presence)'으로 정의한다.
색채 배치에서도 시간의 서사 구조가 드러난다. 화면 하단을 받치는 흑색과 짙은 청색 계열의 지층은 뿌리와 역사의 토대를 형성하고, 좌측 상단의 황금빛 영역과 곳곳에 응축된 보라색 포인트는 권위와 정신적 깊이를 상징한다. 우측을 가로지르는 비취색 궤적은 강렬한 동세를 부여하며, 이 색채들이 대각선 방향으로 흐르면서 정체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적 방향성을 형성한다. 조명 환경에 따라 요철 위의 색채가 굴절·산란하며 매 순간 다른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특징이다.
남인우 화가는 34년간의 화업을 통해 물감의 적층 과정 자체를 예술적 수행으로 정립해 왔다. 관련 학술 분석에서는 이 작업이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우연적 층위 생성과 대비되는 '의도된 축조'의 방법론이며, 안셀름 키퍼의 물질적 숭고를 계승하되 파괴가 아닌 생명 긍정의 방향으로 전개한다는 점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조선 개국공신 가문의 후예라는 역사적 배경은 작품의 서사적 깊이를 더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