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기에 브뤼셀의 EU 본부, '지구촌 기후 리더'를 자처하는 유럽연합(EU)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그들이 꺼내 든 카드는 바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이름도 생소한 이 제도는 단순한 관세 이상의 파괴력을 지니며 세계 무역 질서를 뒤흔들 태세다. 탄소국경세, 즉 CBAM은 과연 무엇이며, 왜 이토록 뜨거운 감자가 되었을까? 그 이면을 파헤치고 우리 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진단해 본다.
탄소에 가격을 매기다, CBAM의 정체
쉽게 말해 CBAM은 '탄소 배출권 거래제(ETS)'를 국경 너머로 확장한 개념이다.
EU는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 강력한 ETS를 운영하고 있다. 기업들이 제품을 생산할 때 발생하는 탄소량에 따라 '배출권'을 구매하도록 강제하여, 탄소 감축 노력을 유도하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EU 내 기업들이 탄소 배출 비용 부담 때문에 경쟁력이 약화되거나, 규제가 느슨한 국가로 생산 기지를 이전하는 '탄소 누출'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방지하고 전 세계적인 탄소 감축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CBAM이다.
즉, EU로 수입되는 제품의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고, EU ETS 가격과 연동하여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수입품에도 EU 수준의 탄소 비용을 부담시켜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의도다.
표면적인 명분 vs. 숨겨진 의도
EU는 CBAM의 일차적인 목적으로 '탄소 누출 방지'를 내세운다. 기후 변화는 전 지구적 과제이며, EU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논리다. 다른 국가들도 탄소 배출 감축에 나서도록 압박하고, 궁극적으로 글로벌 탄소 가격 체계를 통합하여 기후 위기에 공동 대응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속칭 '기후 악당' 국가들에게 탄소 비용을 부과하여 자국 기업을 보호하고, 탄소 감축 기술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무역 장벽으로서의 성격도 짙다. 또한, CBAM을 통해 확보한 재원을 친환경 기술 투자에 활용하여 경제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즉, 기후 변화라는 인류 공동의 목표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려는 이중적인 목적이 깔려있는 셈이다.
어떻게 적용되나? 복잡한 계산식
CBAM 적용 방식은 꽤 복잡하다. 수입 기업은 수입품에 내재된 실제 탄소 배출량을 보고하고, 그에 상응하는 'CBAM 인증서'를 구매해야 한다. 인증서 가격은 EU ETS 배출권 가격의 주간 평균가격과 연동된다. 만약 수출국에서 이미 탄소 가격을 부담했다면, 그만큼 공제받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탄소 배출량 산정 방식, 국가 간 탄소 가격 비교 가능성, 인증서 발행 및 유통 체계 등 수많은 기술적 과제들이 존재한다. EU는 이러한 복잡성을 해결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누가 먼저 표적이 되나? CBAM 우선 적용 품목
EU는 CBAM을 모든 제품에 한꺼번에 적용하기보다는, 탄소 배출량이 많고 탄소 누출 위험이 높은 일부 품목부터 우선적으로 적용한다.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등이 초기 대상 품목이다. 이들 산업은 생산 과정에서 대량의 탄소를 배출하며, EU 기업들이 경쟁력 약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향후 플라스틱, 화학제품 등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는 철강, 알루미늄 분야의 대유럽 수출 비중이 높아 CBAM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 전망이다.
시한폭탄은 돌아간다, CBAM 시행 시기
CBAM은 이미 가동을 시작했다. 2023년 10월부터 2025년 12월까지는 과도기 기간으로, 수입 기업은 탄소 배출량 보고 의무만 가지며 인증서 구매 부담은 없다. 이는 기업들이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고 탄소 배출량 산정 체계를 갖출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진정한 CBAM은 2026년부터 시작된다. 2026년부터는 수입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CBAM 인증서를 구매해야 하며, 그 부담은 단계적으로 늘어날 예정이다. 2034년에는 EU 기업들에 대한 무료 할당량이 완전히 폐지됨에 따라, CBAM 인증서 구매 비용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기업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뜨거운 감자, CBAM을 둘러싼 논쟁 포인트
CBAM은 도입 초기부터 전 세계적인 논란의 중심에 섰다. 주요 논쟁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1. WTO 규정 위반 논란: CBAM이 세계무역기구(WTO)의 핵심 원칙인 '최혜국 대우'와 '내국민 대우' 원칙을 위반하는 무역 장벽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수입품에만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불공정하며, 다른 국가들의 경제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EU는 CBAM이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환경적 목적을 지니고 있어 WTO 예외 규정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법적 공방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2. 선진국 중심의 일방적 조치: 개발도상국들은 CBAM이 선진국의 탄소 배출 책임은 회피하고, 개발도상국의 수출 경쟁력만 약화시키는 불평등한 조치라고 반발한다. 탄소 가격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개발도상국들에게 EU 수준의 탄소 비용을 부담시키는 것은 무리이며, 선진국들이 과거에 배출한 탄소에 대한 책임을 먼저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3. 탄소 배출량 산정의 투명성 및 형평성 문제: 수입품의 실제 탄소 배출량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검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국가마다 탄소 배출량 산정 방식이 다를 수 있으며, 이를 공정하게 비교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도 과제다. 또한, 수출국에서 이미 부담한 탄소 가격을 어떻게 인정하고 공제할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4. 글로벌 무역 보복 및 탄소 클럽 형성 우려: CBAM에 반발하는 국가들이 맞대응 조치로 보복 관세를 부과하거나, 탄소 규제를 강화하는 '탄소 무역 전쟁'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또한, EU와 미국 등 탄소 규제가 강한 국가들끼리 '탄소 클럽'을 형성하여 다른 국가들을 배제하는 무역 질서 개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위기를 기회로, 우리 산업계의 대응 전략
CBAM은 우리나라 산업계에 커다란 위협 요소임이 분명하다. 특히 철강, 알루미늄 등 탄소 다배출 산업의 대유럽 수출 경쟁력 약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위기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탄소 중립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촉매제로 활용해야 한다.
정부는 국내 탄소 가격 체계를 정비하고, 기업들의 탄소 배출 감축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또한, EU와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우리 기업들의 불이익을 최소화하고, 국제적인 탄소 가격 기준 마련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기업들은 탄소 감축 기술 투자를 확대하고, 저탄소 제품 개발에 적극 나서야 한다. 탄소 배출량 산정 및 보고 체계를 갖추고, 공급망 전체의 탄소 배출을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위기 상황 속에서도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기업만이 탄소 중립 시대의 승자가 될 수 있다.
CBAM은 단순한 관세를 넘어선, 새로운 무역 질서의 서막이다. 그것이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역 장벽이 될지는 글로벌 사회의 협력과 대응에 달려있다. 우리나라도 CBAM이 가져올 변화를 직시하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전략적인 대응이 시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