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역사] 124. “왕에게 바치던 그릇이… 지금은 급식으로 쓰인다?”

류큐(琉球) 옻칠(漆器) 혁명, 생존을 선택한 공예의 진화

기후가 만든 기술: 아열대 환경과 옻칠의 탄생

전쟁·미군·급식: 생존을 위해 계속 바뀐 옻칠 산업

류큐(琉球) 옻칠(漆器)은 단순한 전통 공예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 권력, 전쟁, 그리고 생존 전략이 결합된 ‘살아남은 산업’이다. 14~15세기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전래된 옻칠 기술은, 오키나와 특유의 고온 다습한 환경과 만나면서 빠르게 발전했다. 

 

옻은 건조 과정에서 습도와 온도가 중요한데, 류큐의 기후는 이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했다. 이 자연 조건이 바로 류큐를 칠기 생산의 중심지로 끌어올린 핵심 기반이었다.

 

기사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이미지=AI 생성]

 

이 기술은 곧 국가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류큐 왕부는 칠기를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외교와 무역의 핵심 자원으로 인식했다. 이를 위해 칠기 생산을 전담하는 ‘카이즈리 부교쇼(貝摺奉行所)’를 설치하고, 제작과 품질을 철저히 통제했다. 

 

특히 사쓰마(薩摩) 침공 이후, 칠기는 도쿠가와 쇼군과 번주에게 바치는 핵심 헌상품이 되었고, 국가의 위신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기능했다.

 

이 시기의 류큐 칠기는 재료부터 달랐다. 데이고(デイゴ) 나무를 비롯한 아열대 수종이 백골(木地)로 사용되었다. 데이고는 가볍고 뒤틀림이 적어 칠기 재료로 최적이었다. 

 

여기에 나전(螺鈿), 침금(沈金), 마키에(蒔絵), 그리고 츠이킨(堆錦) 같은 고급 기법이 결합되며 독보적인 미학이 완성되었다. 특히 주칠과 흑칠의 대비는 류큐 칠기의 강렬한 시각적 특징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산업은 두 번의 큰 붕괴를 겪는다. 첫 번째는 류큐 처분이다. 왕부가 사라지면서 칠기 생산을 지탱하던 시스템이 무너졌다. 두 번째는 태평양 전쟁이었다.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생산 기반과 장인, 기술이 거의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큐 칠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전후, 미군과 군속을 대상으로 한 기념품 시장이 형성되면서 칠기는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바가스(Bagasse)’라는 혁신적 소재가 등장했다. 사탕수수 찌꺼기를 활용해 칠기 형태를 대량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비용을 낮추고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비록 이후 사라졌지만, 이 시도는 류큐 칠기의 적응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류큐 칠기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는다. 고가의 공예품이라는 인식과 관리의 어려움으로 인해 소비가 급감했다. 생산액은 급격히 줄었고, 장인 수도 감소했다. 그러나 이 역시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되고 있다.

 

오늘날 장인들은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변화를 선택하고 있다. 액세서리 브랜드, 건축 자재, 그리고 가장 상징적인 변화로는 학교 급식용 옻칠 식기의 개발이 있다. 식기세척기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내구성을 확보하며, 칠기를 다시 ‘일상으로 돌려놓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결국 류큐 옻칠은 계속 변해왔다. 왕부의 권력 아래에서는 외교 무기로, 전후에는 기념품으로, 그리고 지금은 일상 생활용품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이 변화의 핵심은 하나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바꾸는 능력이다.


 

류큐(琉球) 옻칠은 단순한 전통 공예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된 생존 산업이었다. 카이즈리 부교쇼를 통한 국가 통제, 전쟁 이후의 기념품 산업, 그리고 현대의 생활용품화까지, 이 기술은 환경과 시대에 맞춰 계속 진화해왔다. 옻칠은 사라지지 않았다. 스스로 형태를 바꾸며 계속 살아남았다.

작성 2026.04.16 07:14 수정 2026.04.16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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