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 것은 천벌뿐이리라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생애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태백(李太白)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백거이(白居易)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당나라의 시인으로서 자()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그는 772, 뤄양(洛陽) 부근의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県, 지금의 허난성 신정시)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5~6세 때 이미 시를 짓고, 9세 때에 호율(號律: 성명철학)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미지: AI image.antnews 제공>

그의 집안은 딱히 이름난 명문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 덕분에 비교적 낮은 가문의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려 10세에 가족들을 떠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당나라 덕종(德宗) 때인 800년에는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는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했다.

 

그의 장한가(長恨歌)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부분은 양귀비가 당 현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죽는 장면을 읊었고, 둘째 부분은 양귀비를 잃고 난 후 현종의 쓸쓸한 생활 모습을 읊었고, 셋째 부분은 죽어서 선녀가 된 양귀비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읊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작가적인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애절함을 고조시키는데 그 문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게 해주소서),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선 두 뿌리가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고 언약했지요)”

 

이런 백거이(白居易)는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3,800여 구의 시를 지은 천재 시인이었다. 그래서 백거이(772~846)는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인 이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韓愈)와 함께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그는 자신의 좌천(左遷) 심경을 퇴기(退妓)의 비파연주에 맞추어 심금을 울리는 전문 616자로 된 장편의 비파행(琵琶行)을 썼는데 그 시()는 그의 장한가(長恨歌)와 더불어 당나라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불후의 명시(名詩)이다. 강주(江州) 사람들은 그런 백거이(白居易)를 기리기 위해 비파행(琵琶行)을 쓴 현장인 장강(长江)으로 흘러드는 심양강(浔阳江) 어귀에 비파정(琵琶亭)을 지었다. 하지만 그 정각은 1,0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청()나라 말기 때의 전쟁 통에 소실되어 현재는 원래 비파정(琵琶亭)이 있었던 자리에는 백화점이 들어서 있고, 비파정(琵琶亭)4km 떨어진 장강(长江)가로 옮겨져 있다.

 

백거이(白居易)의 지우(知友)였던 원진(元稹)은 백거이(白居易)의 문집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서문에서 계림의 상인(常人)이 백거이의 글을 시중에서 절실히 구하였고, 동국의 재상은 종종 많은 돈을 주고 시 한 편을 바꾸었다고 썼다. 백거이는 810, 헌종이 신라의 헌덕왕(憲德王)에게 보내는 국서를 작성했으며, 822년에는 신라에서 온 하정사(賀正使) 김충량(金忠良)이 귀국할 때 황제가 내린 제서(帝書)도 그가 썼다.

백거이는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그 당시 그는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新樂府: 노래 가사)”라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官人)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815)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822년부터 824년까지는 항저우(杭州), 825년부터 827년까지는 쑤저우(蘇州)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남기고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서호(西湖)에 쌓은 백제(白堤)라는 제방은 소동파가 만든 소제(蘇堤)와 더불어 항주의 명소로 유명하다.

 

836년에는 형부시랑(刑部侍郞), 838년에는 태자소부(太子少傅)이 되었으며, 842년에는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74세에는 자신의 글을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75권을 완성한 후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 백거이가 45세 때 지은 비파행은 그를 당()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게 하였다. 이처럼 백거이는 당나라 시문학의 황금기를 이끈 거장으로,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런 백거이(白居易)의 삶을 놓고 볼 때 경제도, 정치도, 문학도 일반 민중(만백성)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결코 역사에 남을 수 없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백거이(白居易)의 멋진 시()에 감동받은 강주(江州) 사람들이 뜻을 모아 그를 기리기 위해 심양강(浔阳江) 어귀에 비파정(琵琶亭)을 지었던 것처럼 정치인, 경제인, 문학인, 종교인들이여, 그대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면 먼저 만백성을 감동시켜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대의 이름 석 자가 만 대에 남으리라. 감동은 없고 충동뿐인 지금의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은 천벌뿐이리라.

 

-손 영일 컬럼 



작성 2026.04.13 08:45 수정 2026.04.1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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