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역사] 121. 류큐(琉球) 흑설탕 혁명...기술인가, 착취인가

기마 신조(儀間真常): 기술을 가져온 순간 산업이 바뀌었다

사타구루마와 제당 공정: 손에서 기계로 바뀐 생산 혁신

설탕 봉행과 전매제: 국가가 ‘설탕’을 지배한 방식

류큐(琉球) 왕국에서 흑설탕(黒糖)은 단순한 식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를 유지하는 핵심 산업이었고, 동시에 농민을 억압하는 구조의 중심이었다. 이 산업은 기술, 제도, 그리고 권력이 결합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출발점은 기술의 도입이었다. 1623년, 류큐 관리 기마 신조(儀間真常)는 사탕수수 자체가 아니라 ‘제당 기술’에 주목했다. 그는 중국으로 사람을 보내 직접 제조법을 배우게 했고, 이 기술이 류큐에 전파되면서 사탕수수는 단순 작물이 아닌 고부가가치 산업 자원으로 변했다. 이 시점부터 류큐 경제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기사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이미지=AI 생성]

 

이 기술 혁명의 핵심에는 ‘사타구루마(サーターグルマ)’가 있었다. 초기에는 나무로 만든 압착기였지만, 이후 돌로 제작되며 내구성과 효율이 크게 향상되었다. 구조는 단순했지만 효과는 강력했다. 

 

중앙 톱니가 회전하면 좌우 톱니가 맞물려 사탕수수를 압착하는 방식이었다. 소나 말이 끌거나 사람이 직접 돌려서 작동했다. 이 장치를 통해 사탕수수 즙을 대량으로 추출할 수 있게 되면서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추출된 즙은 ‘사타야(サーターヤー)’로 옮겨져 가마솥에서 끓여졌다. 여기서 핵심 기술이 바로 석회(石灰) 첨가였다. 석회를 넣으면 불순물이 가라앉고, 맑은 액체만 남는다. 이를 다시 졸이고 식히면 단단한 흑설탕이 완성된다. 이 공정은 단순한 조리 과정이 아니라, 품질과 생산성을 동시에 높이는 ‘정제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 산업의 본질은 기술에만 있지 않았다. 류큐 왕부는 이 설탕 산업을 철저히 ‘국가 통제’ 아래 두었다. 1662년, 설탕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는 ‘설탕 봉행(砂糖奉行)’이 설치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 기관은 재배부터 생산, 유통까지 전 과정을 감독했다. 사탕수수는 지정된 지역에서만 재배할 수 있었고, 생산된 설탕은 개인이 판매할 수 없었다.

 

특히 시마지리(島尻), 나카가미(中頭), 나키진(今帰仁), 모토부(本部), 긴(金武), 이에섬(伊江島) 등 특정 지역으로 재배 구역이 제한되었다. 이는 생산량을 통제하고 밀매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농민들은 설탕을 생산했지만, 그 소유권은 왕부에 있었다.

 

이렇게 수집된 흑설탕은 사쓰마(薩摩)를 통해 일본 본토로 유통되었다. 오사카(大坂)와 교토(京都)에서 높은 가격에 판매되었고, 그 수익은 왕부 재정과 사쓰마에 대한 부담을 해결하는 데 사용되었다. 즉, 설탕은 류큐의 ‘외화 획득 수단’이었다.

 

문제는 이 구조의 이익이 농민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생산은 농민이 했지만, 수익은 국가와 지배층이 가져갔다. 생산량 확대는 곧 노동 강도의 증가를 의미했지만, 생활은 개선되지 않았다. 기술 혁신이 곧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류큐의 흑설탕 산업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기술 혁신과 산업 발전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매제를 통한 강력한 통제와 수탈이 존재했다. 이 구조는 류큐 경제를 유지했지만, 동시에 내부 모순을 심화시켰다.

 

류큐의 흑설탕 산업은 단순한 농업 발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술 혁신과 국가 통제가 결합된 경제 시스템이었다. 사타구루마와 제당 기술은 생산을 혁신했지만, 전매제는 그 이익을 제한된 계층으로 집중시켰다. 결국 이 산업은 류큐를 살린 동시에, 농민을 더욱 억압하는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작성 2026.04.13 06:44 수정 2026.04.13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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