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편집자주) 박동명 법학박사는 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서울특별시 공익감사위원, 강남구 결산검사위원 등을 지냈으며, 국회의정연수원과 지방자치인재개발원 등에서 지방의회 의정활동, 예산·결산 심사, 행정사무감사, 조례입법, 주민참여제도, 인공지능 활용 의정혁신 등을 강의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주민자치회가 형식적 조직에 머무르지 않고 생활자치의 학교로 자리 잡기 위해 필요한 운영 원칙과 제도적 과제를 짚어 본다.
주민자치회가 지방자치법 체계 안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제도화가 곧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은 틀을 마련할 뿐이며, 그 틀 안에 어떤 내용을 채워 넣는가는 결국 사람과 운영의 몫이다. 주민자치회의 실패 사례는 대부분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향이 불분명하고 책임 구조가 모호하며 운영 문화가 취약해서 발생한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확대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제대로 정착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첫째, 양적 확대보다 질적 설계를 우선해야 한다. 주민자치회 법제화 이후 가장 많이 나올 질문은 아마도 “전 읍·면·동에 언제 다 설치할 것인가”일 것이다. 그러나 전면 확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준비되지 않은 지역에 획일적 모델을 강행하면, 주민자치회는 종이 위의 조직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 주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의제를 발굴할 역량도 부족하며, 공무원 역시 조력자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껍데기만 늘리는 것은 제도를 약화시키는 길이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도 주민자치회와 읍·면·동 행정기구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새로운 모델 개발과 발전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법제화 이후에는 전국 동일모형이 아니라, 지역 특성에 맞는 단계적·맞춤형 설계가 필요하다.
둘째, 대표성과 투명성을 제도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주민자치회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누가 어떻게 참여하는지가 분명해야 한다. 공개모집, 추첨, 추천, 선발 기준, 위촉 절차, 회의 공개, 회의록 작성, 예산 집행 공개, 이해충돌 방지 규정, 성별·세대별·계층별 다양성 확보 등이 체계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주민자치회가 몇몇 활동가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순간, 그 제도는 주민 전체의 신뢰를 잃는다. 특히 청년, 여성, 고령자, 장애인, 이주민, 소상공인 등 생활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도록 참여구조를 넓혀야 한다. 주민자치회가 특정 집단의 대리기구가 아니라 주민사회 전체의 공론장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셋째, 역할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주민자치회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가 불분명하면, 행정과 충돌하고 주민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주민자치회는 생활의제 발굴, 마을계획 수립, 주민총회 운영, 주민참여예산과의 연계, 공동체 활성화, 생활밀착형 공공서비스의 공동생산, 지역문제 해결의 숙의 플랫폼이라는 본래 기능에 집중해야 한다. 반면 정당정치의 대리전장이나 단순 민원처리 창구, 혹은 읍·면·동 행정복제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민자치회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조례와 운영세칙, 교육과 매뉴얼 차원에서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넷째, 주민교육과 공무원교육을 함께 강화해야 한다. 주민자치회는 사람을 키우는 제도이다. 주민에게 아무런 학습 기회 없이 참여만 요구하면, 제도는 오래가지 못한다. 주민자치학교, 마을의제 발굴 워크숍, 주민참여예산학교, 갈등조정 교육, 회의 운영 교육, 공공예산 읽기 교육, 생활법규 이해 교육 등이 체계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동시에 공무원에게도 변화가 요구된다. 주민자치 담당 공무원은 지시자나 통제자가 아니라 촉진자, 조정자, 연결자여야 한다. 공무원이 주민자치회를 ‘관리 대상’으로 보면 제도는 경직되고, ‘협력 파트너’로 보면 제도는 살아난다. 주민자치회 법제화가 성공하려면 주민 역량과 행정 역량이 함께 성장해야 한다.
평가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일부 지역에서는 사업 건수, 행사 횟수, 참여 인원 같은 수치가 성과의 전부처럼 다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주민자치회의 진짜 성과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생활문제가 실제 의제로 발굴되었는지, 갈등이 조정되었는지, 주민총회가 형식이 아니라 숙의의 장으로 기능했는지, 주민참여예산이나 행정계획에 주민의견이 실질적으로 반영되었는지, 취약계층의 목소리가 공론장에 들어왔는지, 주민 스스로 지역문제를 해결할 자신감을 얻게 되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주민자치회는 숫자로만 평가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인프라이다.
필자는 여기서 지방의회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주민자치회가 잘 작동하려면 지방의회가 이를 단순 예산지원 대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지방의회는 주민자치회 조례의 정비, 위원 구성의 공정성 확보, 지원 예산의 투명성 점검, 중간지원조직의 운영 실태, 주민총회 결과의 정책 반영 여부, 주민참여예산과의 연계성 등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행정사무감사에서도 주민자치회는 매우 중요한 점검 대상이 될 수 있다. 주민자치회 운영비가 실제 주민역량 강화로 연결되고 있는지, 사업 위탁이 편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특정 세력의 장기 점유가 구조화되지는 않았는지, 주민총회가 보여주기식 행사로 흐르지는 않는지 등은 충분히 따져 보아야 한다.
행정도 달라져야 한다. 주민자치회를 법에 넣었다면, 그다음은 실질적 지원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전담 인력 배치, 표준 매뉴얼 정비, 맞춤형 컨설팅, 회계와 운영 교육, 갈등조정 지원, 우수사례 확산, 실패사례 분석, 조례 정비 지원이 필요하다. 행정안전부 역시 주민자치회 설치·운영 지원을 위한 참고조례안 개정과 현장 의견 수렴을 예고하고 있다. 결국 중앙정부는 법제화 이후의 시행 설계에서 결코 손을 떼어서는 안 된다. 지원 없는 제도화는 방치와 다르지 않다.
주민자치회의 가장 큰 가치는, 주민을 수요자에서 주체로 바꾼다는 데 있다. 주민이 행정서비스의 수혜자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문제 해결의 설계자이자 평가자로 성장할 때 지방자치는 비로소 깊어진다. 그래서 주민자치회는 단순한 마을사업 기구가 아니라 민주주의 학습장이어야 한다. 좋은 주민자치회는 좋은 사업 몇 개를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좋은 주민을 길러 내고, 좋은 공론장을 만들고, 좋은 행정과 좋은 의회를 압박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시점에 서 있다. 주민자치회를 법에 올려놓은 것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통해 진정한 생활자치의 질서를 만들 것인가. 제도는 갖추어졌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치는 여전히 만들어 가야 할 과제이다. 주민자치회가 지역사회의 희망이 되려면, 법보다 운영이 앞서야 하고, 지원보다 신뢰가 앞서야 하며, 행사보다 숙의가 앞서야 한다. 주민자치회의 미래는 법조문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결국 마을의 회의실, 주민총회의 현장, 예산을 둘러싼 토론, 생활문제를 해결하려는 작은 연대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주민자치회는 지방자치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다.
▷법학박사,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한국정책연구원 원장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민참여예산 관련 교육 200회 실시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상임이사
▷(전)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