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리의 서경과 평양
‘우리역사와 땅’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고대 사서인 삼국사와 지나 동이전 및 고리사의 기록을 인용하여 지극히 상식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전달하였다.
그 분석 도구는 단지 역사책만큼이나 사람 삶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는 지명뿐이고,
전문지식도 필요없이 사건 발생지역을 현존 지명과 일치시키려는 노력뿐이었다.
특별하고 전문적 연구 결과 인용은 딱 하나였는데 박창범교수의 일식기록 분석이었다.
즉 일식은 규칙성이 있고 역추적이 가능하므로, 기록된 일식을 거듭하여 관측할 수 있는 지역이 그 나라 수도인 지배층의 거주지역일 것이라는 천재적 발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역사란 사람의 발자취이므로 누구나 상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思考(사고)로 급변하는 세상도 경험하지만,
그 사고조차 타성을 벗어난 것이고 상식을 벗어난 것은 아니어서 잠시의 불편 뒤에 누구나 적응하고, 오히려 발전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교육은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강요’가 지나쳐 단순한 상식조차 파괴한다.
필자의 가슴을 눌러왔던 가위를 몇 가지만 들자면,
교과서가 제시하는 지명 등으로 사건을 지리적으로 추적할 수 없었음이 첫째였다.
두 번째는 전쟁기록에 등장하는 비현실적 숫자,
세 번째는 교역품목의 획기적 변화,
네 번째는 시대와 영토의 흐름이 너무도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이었다. 독자들도 동의할 것이다.
의심받는 현재의 학교 역사
우리 역사의 흐름은 한 시대마다 국가의 수명이 길었기 때문에 매우 단순하다.
(옛)조선에서 삼국, 고리, 그리고 다시 조선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조금만 보태자면, 삼국은 신라가 주도하여 고구리와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백제의 영역을 신라와 함께, 고구리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발해가 나누어 가지므로 남북국시대를 열었고,
신라가 망할 즈음 후삼국시대라는 짧은 혼란기가 있었다.
그 후삼국시대에 궁예를 쫓아낸 고리가 견훤의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신라를 선양받는 형태로 이어져 혼란의 시대를 정리한다.
그 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다.
또 설화집인 삼국유사가 전하는 내용이지만,
옛 조선이 끝나고 연나라의 도망자가 기준이라는 왕을 쫓아낸 위만조선을 한나라가 멸망시킨다는 등의
애매한 사실까지 알면 역사에 꽤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런 단순한 역사의 흐름에도 영역과 도읍이 어디였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너나없이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다.
의무교육인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기껏 (옛)조선에서 삼국까지는 만주까지 넓은 영역을 차지했고,
고리는 압록강 하구와 원산만까지 잘룩한 천리장성이라는 경계선 남쪽이었는데
이성계의 조선은 사군육진 개척 등으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한 것으로 배워서, 그리 알고 있다.
이 학교 역사교육을 의심하는 사람은 너무도 많다.
의심하게 만드는 원인도 다양하다.
기록이 사건의 전개를 도무지 추적할 수 없어 ‘억지스럽네’ 하는 의심을 키운다.
우선 물리적 거리와 숫자가 상식을 늘 넘는다.
고구리를 건방지다고 수나라가 무려 130만이라는 병력을 이끌고 왔다는데,
필자만 아니라 중학생 시절 많은 친구들이 믿지 못하였다.
배와 수레를 타고 그 많은 사람이 오는 것도 무리이겠지만,
병기와 식량의 운반수단이 뭐지 하는 단순한 의문에 답이 없었다.
수나라 수도는 대륙 저 서쪽인데, 그 먼 평양을 쳐들어온다는 修辭(수사)가 미더울 수 없었다.
무리한 침략을 몇 번씩이나 시도하다가 40년도 못 돼 나라까지 망했는데,
당나라가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한다는 사실도 무리다.
설령 압두남(압록강 두만강 남쪽)에 존재하는 국가가 무지막지한 군사력을 갖춰
당장 수와 당을 멸망시키는 위협이 되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그런 힘있는 국가가 수와 당이 성립되도록 허용하였다면, 그 사실이 더 놀랍지 않은가?
제도권 사학 밖의 연구에 더 호의적
이와 같은 학교 역사교육의 모순을 반복 재생산하는 사학계 내부와 달리,
적지 않은 사학과 밖의 학자들에 의한 융합적 연구와 함께,
숱하게 많은 역사애호가들, 소위 재야사학자들은 별도의 사관으로 귀납되어 있다.
즉 고구리, 백제, 신라 삼국은 대륙에 주된 영역이 있었고,
만주를 비롯한 압두남(소위 식민사학의 호칭인 한반도)도 유기적으로 함께 통치되었음에 의견이 대체로 모여 있다.
한편, 열도로 건너가서 일본이 형성되는데,
대륙의 남부에 거주하던 왜인들의 비중이 커보이지만
삼국의 백성들 또한 꾸준하게 건너가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였다.
다만 열도로 건너가면 소통이 거의 끊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어 안타까워하지만, 일부는 몇 번의 침략 때문에 극도로 혐오한다.
필자는 대륙영토 논리를 공유하며, 한발 더 나아가 황해를 둘러싼 일체설을 주장하여
‘우리역사와 땅’의 글로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륙 삼국이라는 동의와 달리,
삼국의 영역과 고리의 영역이 동일 영역일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지 못함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앞서 가볍게 논한 대로 삼국의 두 나라를 멸망시킨 신라의 영역을 고리가 선양받았다면
고리의 영역 또한 대륙에서 유지되었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
일차적 원인은 고리의 수도 개경의 위치가 압두남에 존재하였다는 (학교교육의 세뇌에 의한) 믿음과
서경이 고구리의 평양일 것이라는 史實(사실)을 대부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사서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함도 있으나, 삼국사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우선 삼국사부터 꼼꼼히 읽기를 추천한다.
서경과 평양을 연구하며 동시에 기억하여야 할 사실은 평양이 왕검의 도읍이었다는 기록이 중요하여 함께 찾아보았다.
삼국사 권17 동천왕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다.
삼국사 권37 지리
平壤城似今西亰, 而浿水則大同江是也. ~ 以此言之, 今大同江爲浿水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평양성은 지금[고리]의 서경과 같으며, 패수는 곧 대동강이다. ~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써 지금[고리]의 대동강이 패수인 것은 명백하며, 곧 서경이 평양이었던 것 또한 가히 알 수 있다.
고리사 권58 지리3 서경유수관 연혁
西京留守官平壤府本三朝鮮舊都. 唐堯戊辰歲, 神人降于檀木之下, 國人立爲君, 都平壤, 號檀君, 是爲前朝鮮. ~
太祖元年, 以平壤荒廢, 量徙鹽·白·黃·海·鳳諸州民, 以實之, 爲大都護府. 尋爲西京.
光宗十一年, 改稱西都. 成宗十四年, 稱西京留守. 穆宗元年, 又改鎬京. 文宗十六年, 復稱西京留守官, 置京畿四道.
서경유수관 평양부는 본래 3조선의 옛 도읍이다.
당요 무진년에 신인이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아 단군이라 부르니 이것이 전조선이 되었다. ~
태조 원년(918)에 평양이 황폐하여 염·백·황·해·봉주의 백성들을 옮겨 그곳을 채워 대도호부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서경이 되었다. 광종 11년(960)에 서도라 고쳐 불렀다.
성종 14년(995)에 서경유수라 불렀다. 목종 원년(998)에 또 호경으로 고쳤다.
문종 16년(1062)에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불렀다가 경기 4도를 설치하였다.
단지 세 예문만 보아도 단군이 도읍하였던 곳이 평양이었고, 그 평양을 왕건의 고리는 서경으로 삼았다고 증언하였다.
특별하게 부정하는 자료가 없다면 믿어야 할 것이다.
※ 북한의 평양성에서 발견된 ‘漢城’ 각석 등을 근거로, 해당 지역이 사서 상의 평양이 아님을 지난 2월 6일 “지명이 같다고 언제나 같은 곳일까? 수도 한성은 세 곳”에서 이미 밝혔으므로 참조하여 주십시오.
※ 평양의 위치는 2월 14일부터 27일까지 세 번에 나누어 “낙랑군은 평양의 위치를 알려주는 좌표; 반드시 밝혀야!”로 추정하였으니 참고하여 주십시오. 특히 3편을 꼭 읽어주십시오.

왜 북경 인근과 서경을 잇지 못하는가?
이 땅은 황해를 내해로 하는 ‘환황해 국가’이었지만 대륙 영역의 역사와 조금은 달랐다.
이 땅은 32년 낙랑국에서 고구리로, 503년 고구리에서 신라로, 918년 고리로, 1,392년에 조선으로 이어졌다.
다시 서술하자면, 조선, 낙랑국, 고구리의 영역이었다가, 신라로, 신라의 영역을 고리가 물려받았고, 조선이 된다.
고구리의 대륙 영역은 고스란히 물려받은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하면서
그 일부 또한 고리의 영토가 되었다, 명에게 대부분 빼앗꼈으니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 고구리의 수도였던 평양을 확실하게 발해가 차지했을까,
그 땅을 다시 고리가 넘겨받았을까, 라는 큰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이 필자는 불편하다.
이 확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고리는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으로 전하여져 있다.
이 사실과 함께 고리의 수도인 개경의 위치도 몹시 불분명하다.
일부는 고리 말기 원의 부마국일 때 심양왕이라는 칭호 때문에 심양이 개경이었을 가능성을 말하지만,
그 시기에도 개경은 달리 존재하였음이 분명하므로 심양이 개경일 수 없음은 스스로 증명된다.
만약 개경도 심양이 있는 만주였다면 고리 초기부터 대륙을 포기하였다는 사실이 되어,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이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사료를 들자면,
고리사 태조 18년(935년) 11월 3일 기록에 경순왕이 금성(경주는 후일 태조가 명명한 지명)을 떠나
11월 12일 개경에 도착하였다 하였으므로 열흘이 걸렸다는 사실과 너무도 배치된다.
백관 포함한 수행원이 30리에 이르렀다 하니 군대처럼 신속한 이동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차로 하루 40㎞ 정도 이동한다 가정하고 10일이면 400㎞ 정도이므로, 하북성을 결코 넘지 못했다고 추정해야 옳을 것이다.
한편, 고리사 지리지 기록을 참조하면, 건국 초기에 행정구역을 정리할 여유가 없다가
태조 23년(940)에 주, 부, 현의 명칭을 고쳤다고 하였으며,
성종 14년(995)에 10개 도를 만들고 12개 주에 절도사를 두었다고 전하면서 10개 도의 지명만 기록하였다. 이 도명이 각각
一曰關內, 二曰中原, 三曰河南, 四曰江南, 五曰嶺南, 六曰嶺東, 七曰山南, 八曰海陽, 九曰朔方, 十曰浿西.
첫째는 관내(關內), 둘째는 중원(中原), 셋째는 하남(河南), 넷째는 강남(江南), 다섯째는 영남(嶺南), 여섯째는 영동(嶺東), 일곱째는 산남(山南), 여덟째는 해양(海陽), 아홉째는 삭방(朔方), 열 번째는 패서(浿西)
이들의 도명이 어디인지 설득력 있게 연구된 바 없으나 도명의 상징성으로 보아, 예컨대 하남, 강남, 영남, 삭방, 패서는 결코 대륙이 아니면 성립할 수 없는 지명임은 분명하다.
왜곡 속에 숨겨진 진실
속담에 ‘주머니 속의 송곳’이 있듯이 진실은 언제라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저들의 짧은 왕조 수명의 나라들이 우리의 조상 국가의 임금들을 ‘冊封(책봉)’하였다는 사실은
문자 그대로 笑話(소화)일 것이다.
또 우리가 朝貢(조공)했다는 기록도 같은 범주로 평가할 수 있다.
지나의 역사는 당이 가장 길어 290년이고, 명은 276년, 나머지는 2백 년이 못되고
심지어 오대십국 시대의 후한과 후진이 각각 4년, 9년이라는데,
이러한 나라를 국가라고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인지조차 의심된다.
그러한 갓 건국된 신생국가가 최소 몇백 년씩 장수한 나라의 임금에게,
임금으로 인정한다는 국서를 보낸다는 사실은 발상조차 놀랍다.
한편, 조공이라는 표현에 대한 이해도 바꿔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높고 힘있는 국가에 대한 공경이 아니라, 상대국을 정탐하러 가거나,
정탐 목적을 감추고 특산품을 교역한다는 명분으로 방문하면서 수십 명의 사신들 체재비 등을 방문국에 부담시키므로
빈손으로 갈 수 없으니 비용 대신 지불하는 대금으로 생각하여야 합리적이다.
상대국에서 사신을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기록에서 이러한 진실을 추정해 낼 수 있다.
그 외교문서, 특히 책봉문서에 상대방의 위치를 규정하는 문구는
역사의 실체에 다가가려는 필자와 같은 후학들에게 좋은 자료가 된다.
이미 1월 30일 “연재② 보주성 귀속 문제와 고리의 국제적 위상”에서도 소개하였었지만 다른 기록도 더 예로 들어보자.
권2 太祖(태조)
(癸巳)十六年 春三月 辛巳 唐遣王瓊·楊昭業來冊王, 詔曰 “~ 其有地, 稱平壤, 師擅兼材.
統五族之强宗, 控三韓之奧壤, ~又詔曰 “~ 卿妻柳氏, 今封河東郡夫人.”
〈계사〉 16년(933) 봄 3월 신사 후당에서 왕경과 양소업을 보내 왕을 책봉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 그대는 차지한 땅을 평양이라 일컬었으며 군사를 장악하고 재능도 겸비하였다.
오족의 강한 우두머리를 통합하고 삼한의 비옥한 땅을 지배하여, ~”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 그대의 부인 유씨를 이제 하동군부인으로 봉합니다.”
권3 成宗(성종)
(2年) 三月 戊寅 宋遣大中大夫光祿少卿李巨原·朝議大夫將作少監孔維來冊王,
詔曰 “~. 其有三韓舊域, 百濟遺封, ~
可特授光祿大夫檢校太保使持節玄菟州諸軍事玄菟州都督充大順軍使上柱國, 食邑二千戶, 仍封高麗國王.”
(2년) 3월 무인 송에서 대중대부 광록소경 이거원과 조의대부 장작소감 공유를 보내 왕을 책봉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그대는〉 삼한의 옛 영역과 백제가 남긴 봉토를 차지하였고, ~
이에 특별히 광록대부 검교태보 사지절현도주제군사 현도주도독 충대순군사 상주국 식읍 2,000호를 내리며 인하여 고려국왕으로 책봉한다.”
(乙酉) 四年 夏五月 宋遣太常卿王著, 秘書監呂文仲, 來加冊王.
詔曰, “~. 尊爲漢傅, 進彼侯封, 常安百濟之民, 永茂長淮之族. ~”
〈을유〉 4년(985) 여름 5월 송에서 태상경 왕저와 비서감 여문중을 보내 왕에게 〈벼슬을〉 더하여 책봉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그대의 관작을〉 높여 한부로 삼고 후작으로 승진시키니,
늘 백제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길이 장회의 겨레를 무성하게 하라. ~”
권7 문종1
(丁亥 元年 九月) 壬午 契丹遣福州管內觀察使宋璘, 來冊王.
其冊曰, “眷乃馬韓之地, 素稱龍節之邦, ~
(정해 원년 9월) 임오 거란에서 복주관내관찰사 송린을 보내 왕을 책봉하였다.
그 책문에 이르기를, “돌이켜 보건대 마한 땅은 본래 제후의 나라로 일컬었으며, ~”
제도권의 사학에서 삼한과 함께 가야(가라)의 영역을 압두남에 있었다고 못박아 가르쳤으나,
왜와 함께 삼한과 가야는 대륙에 존재하였던 유연제로와 오월이 있던 땅에 있을 수밖에 없는 政體(정체)였음은 누누이 밝힌 대로다.
강조하자면 마한을 세우는 ‘箕準(기준)’이 압두남에 생존하였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또 백제의 주된 영역도, 장회라는 양자강과 회수를 가리키는 용어도, 대륙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신다면
위의 책봉문서는 고리가 대륙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된다.
더욱이 가난한 농민으로 구성된 홍건적이라는 반란군이 수와 당의 엄청난 대군과 마찬가지로
이 땅까지 올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야 상식적이다.
학문은 의심과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사실을 듣거나 보면서 합리성이라는 잣대로 판단하여
왜, 어떻게 다를까, 생각하여야 발전이 있다.
즉 타성에 붙잡히면 발전도 행복도 없음이다.
역사는 사람 삶의 기록이라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
억지스러운 사실에 세뇌되어 판단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흐름인가, 아닌가
판단하여 얻는 결과의 끝에 만족과 행복이 존재할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이 다소 불편한 독자가 많을 수 있다.
그러나 冒頭(모두)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특별히 비상식적 자료에 근거하여 서술하지 않고,
정통 사서와 사람 삶의 흔적이 남는 지명으로 해석한 내용인 만큼, 잘못된 내용은 없을 것이다.
독자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 지식을 되돌아보시기를 요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