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돈 교수의 좌충우돌 성경신학[6] - 경배, 그 의미를 다시 묻는다면?

"백지 시험지엔 답이 없다"… 내 믿음을 증명할 '진짜 문제'를 찾아라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 불가' 구역? 주님이 선을 그으신 이유

장사꾼의 흥정 대신 기도의 향기를… '어설픈 찬양' 너머의 진짜 경배

박상돈 교수 | 합동총회신학교 성경신학


믿음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크고 작은 믿음, 거짓 믿음과 불량 믿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흔히 우리는 믿음을 달아본다고 말합니다. 분명 믿음은 무게로 측정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믿음을 달아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믿음 여부를 확인하는 상용어구라고 보면 됩니다. 

 

자, 문제는 내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확인하는가입니다. 분명 성경은 내가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고후 13:5). 그러니 믿음 안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험 내용이 관건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시험 본다며 백지 시험지를 준다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누구라도 문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가 없는데 어떻게 답을 내겠습니까? 그러니 문제가 있어야 답이 나온다며 재촉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한밤중 왕이 두렵고 떨린 꿈을 꾸다 깨어 일어났습니다. 다시 자려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질 않습니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왕이 점쟁이와 술사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느닷없이 자기가 꾼 꿈과 그 꿈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술사들은 하나같이 꿈을 말하면 해석하겠다고 말합니다. 왕은 거듭 자기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너희가 꿈도 말하고 해석까지 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술사들은 그 누구도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술사들은 입을 모아 신이 아니라면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왕은 화가 치밀어 그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누구 이야기인지 짐작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선지자 다니엘 이야기입니다(단 2장 참조).

 

선지자 다니엘은 왕이 꾼 꿈도 말하고 그 꿈도 해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니엘이 아니니 시험 문제를 알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다니엘처럼 공부해도 다니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방향을 바꿔 문제를 찾아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여전히 어렵겠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쉽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문제가 될 법한 내용을 찾아내면 되니 말입니다. 

 

사실 성경은 온통 시험 문제로 가득합니다. 특히 요한 문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저기 하나님께서 주신 질문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 질문을 찾아내 답을 풀어가는 작업이 사실은 믿음입니다. 그러니 문제를 풀려면 믿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떻게 풀어갈 수 있는지 방향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돌고 돌아 내가 믿음 안에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관건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요한에게 주신 확인 도구는 무엇입니까? 요한은 무엇으로 그 누군가를 믿음 안에 있는지 확인합니까?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교회 다닌다고 다 믿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인(church man)과 신자(believe man)을 구별하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초대교회도 그런 식으로 구분했나 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10:11). 본문은 그 소명과 맞물려 이어진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지만 누군가는 믿고 또 다른 누군가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전도자는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 복음을 전해야 좋겠습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입니까? 당연히 복음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문제는 복음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보여준 다음 행동입니다. 솔직히 복음을 듣고 반응한 모든 사람이 다 믿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탈락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뒤쳐지기도 합니다.

 

사람만큼이나 신앙은 제각각인데 어떻게 평균값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이만한 믿음이면 되었다고 하는 기준이 있기는 합니까? 소위 신앙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시험과 점수가 있기는 합니까? 놀랍게도 사도 요한에게 주신 새로운 소명은 시험 감독관이었습니다. 

 

본문을 찬찬히 음미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요한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측량하라는 말은 쉽게 말해 선 긋기와 같습니다. 그렇게 안과 밖을 확실하게 구분하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측량할 범위까지 정확하게 일러주셨습니다. 그런데 측량할 대상은 놀랍게도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을 측량하되 제외한 공간이 어디입니까? 성전 바깥마당인데, 이는 성전인 듯, 성전 아닌 묘한 장소입니다.

 

물론 성전 바깥마당도 성전임이 분명합니다. 왜냐면 성전으로 돌아가는 문이 거기에 있습니다. 돌담으로 에워싸인, 세상과 구별된 공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성전 바깥마당도 틀림없이 성전이 맞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교회 출신에게는 성전 바깥마당이 남다릅니다. 하물며 사도 요한이라면 아름다운 추억이 정말 많지 않겠습니까? 성전 미문에서 베도로가 외쳤던 한 마디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이 외에도 사도 요한에게는 바깥마당에 대한 추억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버려두라고 하십니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신나고 재미난 일은 거의 다 바깥마당에서 생깁니다. 제물로 사용될 짐승을 사고파는 흥정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환전상이 있어 세상 화폐는 다 구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깥마당은 성전인데 세상 사는 맛이 물씬 풍깁니다. 예수님은 그 장사꾼들을 내쫓으시고 짐승들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임을 밝혔습니다(막 11:17).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에게 바깥마당을 측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깥마당이 어디까지인가입니다. 왜냐면 측량 대상이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입니다. 성전과 제단은 좁은 개념으로는 지성소와 성소를 뜻합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측량하라는 의미를 제대로 살린다고 보입니다. 그러니 측량 대상은 최소한 성소에서 경배하는 자여야 합니다. 결국 경배 역시 그가 어디에 있는가와 맞물린 의미 아니겠습니까? 성소에서 경배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맞습니까? 더구나 지성소에서는 어떻게 경배해야 옳습니까? 

 

이제, 이참에 경배를 어설픈 찬양으로 도배해도 괜찮은지 되물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성 2026.04.08 13:35 수정 2026.04.0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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