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기술 발전이 가져온 규제의 함정
인공지능(AI)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규제와 정책의 부재로 인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AI 기술은 의료, 금융, 제조 등 다양한 산업을 혁신하며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적 성과와 달리 AI 관련 규제와 정책의 틀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채 교착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글로벌 거버넌스 체계를 확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AI의 안전성과 윤리를 둘러싼 논의가 단순히 선언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현실입니다.
채텀 하우스(Chatham House)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바렐라 산도발(Francisco Javier Varela Sandoval)은 최근 기고문 'AI 거버넌스의 교착 상태를 깨는 방법: 위기가 어떻게 글로벌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Breaking the deadlock on AI governance: How a crisis could lead to global coordination)'에서 현재 AI 거버넌스가 직면한 근본적 딜레마를 명확히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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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AI 분야의 급격한 지정학적 변화, 제도적 취약성, 공공 및 민간 부문 간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AI 협력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고 진단하면서도, 역설적으로 "AI로 인한 대규모 위기가 발생했을 때 비로소 국제 사회가 효과적인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의지를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산도발의 분석은 단순한 비관론이 아닙니다. 그는 위기가 오히려 전 지구적 협력 구조를 구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며, 이를 위한 구체적이고 선제적인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그가 제시한 '오프더셸프(Off-the-Shelf)' 조약 프레임워크는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위기 발생 시 즉시 활용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된 모듈형 협약 체계를 의미합니다.
마치 선반에서 꺼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처럼, 위기 상황에서 신속하게 배치할 수 있는 규제 프레임워크를 사전에 개발해두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위기 발생 후 협상과 합의에 소요되는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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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산도발은 AI 안전 및 보안을 담당할 기관을 신뢰할 수 있는 공공 기관으로 미리 지정하여 위기 대응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도 제안했습니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누가 주도권을 갖고 대응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해법입니다. 국제 사회가 평상시에 특정 기관에 정당성과 권한을 부여해둔다면, 위기 발생 시 혼란을 최소화하고 신속한 대응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AI 거버넌스의 실패 사례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2010년대 후반부터 급성장한 딥러닝 기술을 기반으로 한 자율주행, 의료 데이터 분석, 안면인식 시스템 등이 규제 공백 속에 발전하면서 개인정보 침해, 편향된 알고리즘, 윤리적 책임 소재 불명확 등의 문제가 잇따라 제기됐습니다. 특정 기술 독점이나 데이터의 비대칭적 소유로 인해 소수 국가와 기업이 이익을 독점하는 구조가 고착화되는 문제도 점차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AI 기술이 가진 잠재적 위험성이 현실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조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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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촉진할 글로벌 협력의 가능성
AI 분야에서 협력의 어려움은 지역적, 지정학적 요소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요 기술 강대국은 AI 기술의 개발과 도입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투자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쟁적 구조는 협력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산도발은 이러한 지정학적 긴장이 평상시에는 협력을 저해하는 요인이지만, 대규모 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극명하게 부각시킬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역사적으로 국제 사회는 공통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이념과 이해관계를 넘어 협력해온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AI 거버넌스의 교착 상태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한국은 AI 기술 도입과 활용에서 빠르게 성장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힙니다.
정부는 'AI 국가 전략'을 통해 기술 개발과 산업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AI 관련 연구개발에 상당한 규모의 투자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적 체계나 윤리적 기준은 여전히 발전 단계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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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AI 기술이 활용되는 분야에서 데이터 규제와 개인정보 보호 이슈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글로벌 협력의 틀 안에서 한국의 규제 모델을 선제적으로 정립할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기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급속한 기술 발전을 경험하면서도 민주적 거버넌스 체계를 유지해온 한국의 경험은 AI 규제에 있어 균형 잡힌 접근법을 제시하는 데 유용할 수 있습니다. 국내 AI 생태계에서도 위기를 대비한 글로벌 협력 체계 구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AI는 본질적으로 국경을 초월한 기술이지만, 대부분의 규제 논의가 각국 내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한국은 글로벌 규제 논의에 적극 참여하면서, 기술 발전과 안전성 확보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는 중립적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기업들은 글로벌 AI 양대 강자인 미국과 중국 기술회사들과의 경쟁 속에서도 협력적 관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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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AI 정책, 선제적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선제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상되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특히 글로벌 협력이라는 목표가 이상적일지언정, 현실적으로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하는 상황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회의론이 있습니다.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과연 주요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일부 양보하면서까지 공동의 규제 체계에 합의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입니다. 그러나 산도발의 논지는 바로 이러한 회의론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는 평상시에는 협력이 어렵더라도, 대규모 AI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위기는 모든 이해당사자들에게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며, 이것이 바로 정치적 의지를 결집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국제 사회는 위기를 통해 협력을 도출해냈으며, 특히 기술적 변화는 공동의 관심사로 국가적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상대적으로 용이한 영역으로 평가됩니다. 따라서 AI 거버넌스도 충분히 국제 협력의 성공 사례로 발전할 여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산도발이 강조한 '오프더셸프' 조약 프레임워크와 AI 안전기관 사전 지정은 바로 이러한 선제적 준비의 구체적 방안입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처음부터 협상을 시작한다면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미리 준비된 틀이 있다면 신속하게 활성화하여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재난 대응 매뉴얼을 평상시에 준비해두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결론적으로, AI 거버넌스는 현재의 규제 교착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글로벌 협력의 새로운 틀을 모색해야 합니다.
산도발의 분석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위기는 불가피하게 다가올 수 있으며, 그때를 대비한 선제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국가 간 협력뿐만 아니라 공공과 민간 부문의 균형적인 참여 역시 중요합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국제적 변화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하며, 글로벌 AI 규제 논의에 건설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AI 기술이 미래 사회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만큼, 우리 모두가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책임 있는 자세로 접근해야 할 시점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지혜와 준비가 지금 필요합니다.
김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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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chathamhouse.org
aihub.org
mediu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