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한 지인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왔다. 급한 일이 있어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를 물어보려던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머릿속에서 번호를 떠올려 바로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추게 됐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스마트폰을 꺼내 연락처를 검색한 뒤에야 번호를 전달할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게 된 걸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꽤 많은 것을 기억하며 살던 사람들이었다. 친구 집 전화번호 몇 개쯤은 자연스럽게 외우고 있었고,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가사도 머릿속에 줄줄이 담겨 있었다. 길을 찾아갈 때도 지도나 표지판을 보며 머릿속에 길을 그렸다. 기억력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화번호는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고, 길은 내비게이션이 안내한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머릿속을 더듬기보다 검색창을 먼저 연다. 기억해야 할 이유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인간에게 거대한 ‘외부 기억장치’를 만들어 주었다. 스마트폰 속에는 수백 개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고, 인터넷에는 거의 모든 정보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 정보를 굳이 기억할 필요 없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면 된다. 이 편리함 덕분에 우리는 더 많은 일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한 가지 능력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다. 바로 기억하는 능력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구글 효과’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어떤 정보를 쉽게 검색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정보를 기억하려 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대신 우리는 “그 정보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기억한다. 기억의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기억이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기억은 생각의 재료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머릿속에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 줄어들면 사고의 깊이도 함께 얕아질 수 있다. 검색은 정보를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생각을 대신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 인간을 더 나쁜 방향으로만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해야 할 부담이 줄어든 만큼 우리는 다른 능력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를 찾는 능력, 정보를 연결하는 능력,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 같은 것들이다. 기억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면, 지금은 어쩌면 이해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 한 가지 중요한 질문 앞에 서 있다. 기억하지 않는 인간은 과연 더 똑똑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디지털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미지: 제미나이생성이미지)










